에베소서
2014.08.03 09:54

(24강) 가까워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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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1-13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1113(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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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설교>

 

12절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란 이방인을 지칭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면서 유대인보다 이방인이 더 존재론적으로 못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실 유대인은 외적 조건만을 기준 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에 해당 되고,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도 있는 민족입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이방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교하면서 신앙적인 조건에서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조건적 차이는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다르게 율법을 받았고 언약도 받았고 하나님도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구원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이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 역시 자랑의 조건이 못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경험을 했건, 그들 역사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에 비해 이방인은 구원의 조건에서 더 멀리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보다 더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유대인에 대해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비록 약속의 언약을 받긴 했지만 그들 역시 언약에 대해 외인이었을 뿐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라는 위치에 속한 것입니다. 또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절망의 존재일 뿐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별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무엇을 기준으로 하든 차별은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은혜에 마음을 두지 않는 증거로 드러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8-9절)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 자신에게서 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면 자기 행위를 자랑할 수 없고 차별 또한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들 행위에서 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십자가만 자랑하는 관계로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은 구원으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몰랐고 그리스도 밖에 있던 외인들이기에 구원과는 무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 역시 구원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도 할례를 받은 것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 역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로 가까워지고 구원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구원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피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라고 해도 피가 아니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천하제일의 도덕군자요 선행을 행한 자라고 해도 역시 피가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방인도 유대인도 예수 안에서는 누가 더 낫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가 혼합되어 있었고 대다수는 이방인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신자들은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율법의 전통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방인 신자들은 그 같은 주장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둘 사이는 하나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그 믿음의 의미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믿음의 세계 역시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적 관계로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사건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복음의 정신에 깊이 머무를 때 교회의 하나 됨은 자연히 나타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이방인 신자를 향해서 그들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고 그런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을 옥에서 서신을 써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한 개인을 구원하는 것으로 그 능력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 능력의 전부이고 그것이 예수님이 피 흘리신 이유고 목적이라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보내면 될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교회를 향해 하나 됨을 가르칠 필요 없이 예수를 잘 믿으라는 말만 하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죽은 자로 나오게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 역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에 의해서 신자는 자신이 죽었음을 알게 되고 죽었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능력에 다스림 받는 신자의 모임, 즉 교회는 모든 차별이 묻어지고 대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을 보시고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피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면서도 유대인, 이방인과 같은 차별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나는 너보다 낫다’는 우월과 함께 차별이 있게 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면서 교회 됨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이 피의 의미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음으로 하나님께 멀리 있던 우리가 가까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소망 없는 것은 그 속에 예수의 피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아래 있는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는 것이 신자를 기쁨과 평안으로 끌어갑니다. 더 이상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할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 32:1,2절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고 죄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 복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되는 것으로 자신이 어떤 세계로 부름 받아 나와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하나님의 정죄를 받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 인간의 비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정죄를 받지 않는 예수 안에 부름 받았다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성공보다 넘치는 복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의 세계를 놓치게 되면 유대인이 이방인을 차별하고 이방인은 이방인 나름대로 유대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진 하나 된 관계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일을 위해 온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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