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8.24 10:03

(26강) 하나님과 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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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6-18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16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말씀의 세계는 현대인들에게 늘 낯설게 다가옵니다. 말씀은 현대인들이 관심두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도 예외는 아닙니다. 화목이 전제하는 것은 불화입니다. 불화의 상태가 있기 때문에 화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불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불화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관심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으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 불안감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습성이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현재의 삶에 대한 문제나 관심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낯선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세계를 살고자 하는 관심으로 모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자기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가진 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일상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접근을 하면서 세상에서는 배울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문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참된 평화에서도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의 부자라고 해도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이유가 하나님과의 불화에 있기 때문에 참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화목은 신앙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16절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 화목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소멸된 원수된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을 때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인간은 죄인임이 드러났고 심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원수로 부각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시고 그 의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십자가 밖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의가 되었고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비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신앙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을 알고 그 화목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되었는가를 안다면 이들은 서로를 비방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를 화목하게 한 것이 아니라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습니다. 둘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뜻합니다. 이들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막혀 있던 담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율법입니다. 이 율법으로 인해서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을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세계에서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15절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폐하셨으니 유대인은 더 이상 의의 기준으로 율법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방인과도 원수 된 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고 한 몸의 관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신자가 한 몸의 관계로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이유로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화목은 교리적인 문제로만 이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연결되어 나타나야 할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교회가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신앙을 구분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알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안다면 그 어떤 실천적 노력으로도 의를 이룰 수 없는 행위를 기준하여 신앙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소멸하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지도 의로 인정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는 것을 교회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 것을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는 행함이 기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와 기뻐하지 않는 신자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의 연합이 아닙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십자가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내세울만한 자기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교회 일을 좀 더 열심히 한다면 그러한 마음과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우월감을 내세우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영원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이러한 교회됨을 스스로 허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불화했던 자신의 실전을 잊지 않는 것이고 부활을 화목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늘 자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분열이 있다면 그 원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기준이 결국 분열을 초래하고 서로의 관계에 담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결국 타인에게 자기 기준, 자기 생각을 요구하게 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분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여김 받게 했다는 복음 안에서 한 몸의 관계로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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