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8.31 09:59

(27강) 한 성령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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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6-18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1618(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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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해서 신자라는 거룩한 신분의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다시 정리해 보면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로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름으로 항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인간은 저주 아래 있는 신분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스스로의 노력과 깨달음으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살리셨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셔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크신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진 능력인데, 이 같은 긍휼과 사랑을 입게 된 것이 인간의 외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을 또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그 의도를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신자라는 거룩한 신분의 자리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우월감이라는 것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라는 거룩한 신분의 자리는 우리의 행함과 의는 전혀 개입되지 못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의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성령 안에서라 함은 아버지께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는 우리의 어떤 행함으로도 나와 너를 구분하고 차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서는 재산이나 지식, 지위 등을 기준하여 사람을 나누고 각기 다르게 대우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세상 기준은 의미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아는가?를 물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배운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그 머릿속이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성경지식이 예수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합니다. 그래서 한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성령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한 성령 안에서 동일한 은혜와 동일한 신분, 동일한 존재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습니다. 목사, 장로 등의 직분이 평등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유지될 때 그 열매는 화평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비판과 차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새로운 존재로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성도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왜 수시로 분란과 다툼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신자의 자리에 오게 되었는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신자에게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그 모든 문제가 예수님의 피로 가려지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도 받고 있음을 믿는다면, 그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만 아니라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역사되고 있음도 믿어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비록 조건과 행함 등이 나보다 부족하게 보인다고 해도 결국 그것으로 차별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되기보다는 화평으로 증거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절의 말씀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인간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천 년 동안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은 유대인이라는 것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입니까? 아니면 만인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를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과 자격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적어도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관계에 있는 교회에서는 자신의 우월함의 조건으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 16:13절을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오셨고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진리로 인도 받지 못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진리를 아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위 성령의 역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확인하고 증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결국 서로 다른 체험으로 인해서 성령의 역사에 다른 차별을 두게 되고 ‘한 성령 안에서’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허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신자마다 각기 다르게 역사하실까요?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는 크게 역사하고 믿음이 적은 신자에게는 적게 역사하는 것입니까? 그러한 성령은 없습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일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합니다. 물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고 은혜의 분량을 알아가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동일하게 성령의 강권하심에 의해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차이가 없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 고침을 받은 체험을 했다는 사람도 많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러한 체험이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진리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소위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자기 체험을 성령 받음의 증거물로 내세우고, 체험이 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증거물로 믿기 때문에 성령 받음에 대해 차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신기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들도 신기한 능력을 행했습니다. 병을 고치기도 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도 행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것을 성령 받음의 증거로 말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책망하심으로 내가 죄인 됨을 알고 예수님만이 의가 되시고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곳으로 바라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뜻과 소망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고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이 강하고 연약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소망이 강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실력이 아닙니다. 순전히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성령 안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은 신자의 모임인 것이고, 이러한 모임에서 드러나고 증거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일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화평입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성령의 역사일 뿐입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성령에 의해서 행하게 된 일입니다. 때문에 나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거룩한 자가 되게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의 은혜에만 마음을 집중할 때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의 관계로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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