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본문>
본문에서 바울은 ‘비밀’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이며, 그리스도의 비밀은 복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복음이 비밀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 담겨 있음을 생각한다면 은혜의 경륜 자체가 비밀로 주어졌다는 의미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자체가 세상이 알 수 없는 비밀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알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셨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것이 신자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 됨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으로도 얼마든지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자 됨을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잣대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필히 왜곡된 신자의 모습만이 우리의 마음에 각인 될 뿐입니다.
은혜의 경륜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 경륜은 인간의 행함이나 공로를 용납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의 경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비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비밀이라면 적어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나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정도는 되어야 관심이 집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 즉 복음의 비밀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그 중심 내용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비밀에 대한 흥미는 반감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6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는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하고 쉬운 내용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비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함께’라는 관계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방인이 율법을 받아들이고 지킴으로 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된 일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은혜의 경륜을 깨달았다면 은혜 안에서 인간의 모든 공로와 행함은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일을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행함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복 주시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과연 그런 의미의 은혜를 생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많은 일을 하고 공로를 쌓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인간의 힘으로도 할 수 있고, 크고 많은 일은 은혜로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야 말로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며 비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용이 평범하다고 해서 쉽게 비밀을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했지만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믿는 그들만을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정한 유대인은 유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으로 인정되는 것인데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은 민족성만을 붙들었을 뿐이지 그리스도의 비밀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고하는 것과 삶의 모습은 바울과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 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과는 너무 다른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까? 바울의 증거는 제아무리 악독한 살인자라 할지라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이 이 내용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고 기쁨으로 그 비밀에 참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사람의 행함과 공로가 잣대가 되어 판단되고 행함과 공로가 있는 자의 신앙이 인정되고 높임 받는다면 그래도 그것을 은혜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아는 상태에서 그러한 모습을 나타날 수없기 때문입니다.
행함과 공로는 율법의 세계 안에서 인정될 뿐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율법의 세계를 부수고 세워집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셨고 신자는 그 행하심의 수혜자로 자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존재로 머무는 것이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 꿈틀거립니다. 그것이 육의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게 되는 것이고 전도나 선교 구제에 뜻을 두면서 결국 그 일을 행하는 것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전도, 선교, 구제가 나쁘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일들은 신자가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거나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이 곧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비밀만으로도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신앙을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실천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거나 약하거나 게으른 것으로 평가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여전히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1절에 보면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갇히게 된 것은 바울이 유대인의 신앙과 율법을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복음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것이 미움을 사고 옥에 갇힌 이유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밀을 깨닫고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의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자 참된 생명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율법에 있지 않음을 알고 그 사실을 증거 했을 뿐입니다. 비밀을 알게 된 바울에게 그 모든 것이 기쁨이었지만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향해 문이 열릴수록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 것처럼 나의 소유 전부보다 그리스도가 귀하다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을 깨달은 신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붙들려 인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신앙이 보잘 것 없이 보인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함께 한 몸으로 굳게 세워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