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11.09 09:44

(37강) 교회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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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3:10-11http://onlycross.net/videos/eph/eph-0310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설교>

 

사도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드러내어 알게 하는 통로요 도구로 세움 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선악개념은 항상 옳음과 그름, 잘남과 못남, 높고 낮음으로 구별하고 차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별과 차별의 기준이 인간이 갖고 있는 어긋난 가치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악개념의 시각에서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잘났고 옳고 높고, 저 사람은 별 볼일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사도 바울과 베드로 둘 중 누가 더 잘났습니까? 둘 다 동일하게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잘남과 못남으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이 이룬 업적을 생각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사도 바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같은 사도를 수십, 수백 명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면 복음 전파에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더군다나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기 전에는 복음의 핍박자로 활동했습니다. 바울에 의해 스데반이 죽기도 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고자 한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었다면 그가 복음의 핍박자로 활동하는 것을 막으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의 핍박자라는 바울의 과거로 인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바울의 사도성에 의심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과 생각에서 벗어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과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이 지혜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따라 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개의 교회가 기둥 같은 일꾼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빈자리를 채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지혜로 세워진 교회에 어울리는 기도일까요?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는 능력이 있어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일꾼입니다. 때문에 일꾼이 많을수록 교회가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일꾼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속마음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자연히 믿음 좋은 신자로 인정받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하는 일꾼입니다. 반면에 타인이 볼 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책망의 대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방식만으로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적 일에 참여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정부와 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하고, 환경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제아무리 선한 일에 앞장선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사회적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회적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회의 교회됨을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일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이 누구냐?’입니다.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름 받은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누구입니까? 교회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사회적 지위와 위치, 소유 재산 등으로 우리를 저울질하며 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함께 하고 있는 교회에서 우리는 오직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죄인으로 함께 하게 됩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죄인을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구원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아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못난 자의 소굴입니다. 잘난 자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잘난 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못나고 악한 자의 소굴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교회가 이 지혜를 나타내고 알게 하는 일에 힘쓴다면 늘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가 누구인지 본질적인 우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고전 1: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 그 의를 앞세워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롬 11:30-32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을 얻게 하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곧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하지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십니다. 이유는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신다면 우리에게는 긍휼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행함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100을 완전이라고 할 때 단 하나만 순종하지 못해도 그로 인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셨다면 우리의 끝은 긍휼 없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순종이라는 행함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결국 순종의 여부로 신앙이 저울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통치자와 권세는 천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려 한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는 천사들도 모를 만큼 깊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아시는 일입니다. 이 비밀의 경륜,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고 알게 하는 도구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내가 누구인가?’에 생각을 고정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아들이었을 뿐이고 진노의 자녀로 영원한 저주에 갇힌 것이 마땅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을 입게 하셔서 교회로 부름 받게 되었다는 이 사실에 여러분의 생각이 고정되어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연히 잘남과 못남, 높고 낮음이라는 차별은 사라지게 되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만 있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교회의 일이고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구원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왜 우리 같은 못난 자를 부르셔서 교회로 세우시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교회의 역할, 책임을 사회적 시각으로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교회로 모였습니다. 이 지혜를 알게 하는 일에 뜻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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