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현대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생활의 폐해는 ‘나의 믿음은 바르다’라는 자기 정당성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교회에서 신앙생활이 바른 믿음의 증거로 작용하면서 신앙생활의 여부와 정도를 따져 믿음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문제는 신앙생활의 기준과 이해가 각기 다름으로 해서 서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여 충돌하고 다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자주 충돌하는 문제가 술과 제사 음식이다. 술 마시는 것을 죄로 간주하여 금지하는가 하면 성경에 술 마시지 말라는 내용이 없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을 근거로 취하지만 않으면 마셔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제사가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제사에 참여하거나 그 음식 먹는 것을 죄로 간주하여 금지하는가 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제사 음식이라고 해서 더러워진 것이 아니니 먹어도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서로가 성경적인 바른 믿음을 명목으로 논쟁과 다툼으로 나아가지만 그 내용을 보면 ‘죄다. 죄가 아니다’의 논쟁이고 다툼이다. ‘죄니까 하면 안 된다.’ 와 ‘죄가 아니기 때문에 해도 된다’라는 싸움이 교회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지 마셔도 되는지, 제사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지 먹어도 되는지의 행함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성경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할 뿐이다.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사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인간은 저주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행함을 ‘옳다 그르다’로 구분하지 않으며 행함으로 인간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로마 교회의 문제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울이 채소만 먹는 것을 믿음이 연약한 자로 말한다는 것이다(롬 14:2). 그렇다면 바울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과 채소만 먹는 믿음에 차이를 두는 것인가? 여기에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3절)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을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채소만 먹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믿음이 되기까지 용납하고 받아주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바울의 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과연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과 채소만 먹는 믿음에 차이를 두는가?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어쨌든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이 연약하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과 채소만 먹는 믿음은 다르지 않다. 이유는 모든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이 믿음에는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는다. 이 믿음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강한 믿음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약한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같은 믿음을 받았는데 사람의 자질과 노력에 따라 강해지고 약해지는 것도 없다. 믿음이 인간을 장악하고 다스리며 하나님의 뜻이 있는 십자가에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도의 믿음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음식을 먹든 채소만 먹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있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고 먹지 않은 행함을 내세워 서로의 믿음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을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는 자로 바라보지 않는 죄가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도는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먹고 먹지 않은 행함으로 믿음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인한 용서의 은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결과가 된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연약한 믿음을 말하는 것도 실제로 연약하고 강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연약하게 보이는 믿음의 성도라 해도 예수님의 용서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묶인 형제의 관계에서는 비판하고 비판받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유다. 비판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과 가치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죄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도 형제를 비판한 행위에 대해 심판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정죄함이 없는 자로 서는 것이기 때문에 행함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에 따라 상벌이 주어지는 심판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를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벌을 피하고 상을 받기 위해 자기 행함을 돌아보며 옳은 행함으로 자신을 관리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용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죄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로 인정되는 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성도뿐이다. 음식을 먹고 먹지 않은 것으로 의롭게 되는 성도는 없다. 그래서 ‘술을 먹는 것은 죄고 제사 음식을 먹는 것도 죄니 나는 그것을 금한다’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용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죄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 때를 대비해서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자신의 죄를 보면서 예수님의 용서에 감사하는 무리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나중 일이 아니다. 날마다 드러나는 죄를 통해서 예수님의 용서에 강하게 붙들리고 감사하는 것이 심판대 앞에 선 자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