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설교>
사도는 6절에서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로 일컫는 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며 상식처럼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만유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만유의 아버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유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로 일컫는다면 그것은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뜻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로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원하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 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시라는 말씀에서 먼저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주는 한분이시고 창기와 같은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기처럼 살려고 하는 나를 끝까지 붙들고 계시는 분이 나의 아버지시고 주인이시라는 말씀 앞에서 나에게 주인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도 항상 내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발버둥 치며 살아온 실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반역한 자가 바로 나 자신이며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에 대해 눈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이 말은 만유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으며 하나님이 곧 존재 근거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없이 만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유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지금도 존재하시며 만유를 다스리신다는 증거는 만유의 존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만유는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은 인간을 주인의 자리에서 밀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과학이 발달하고 과학의 힘으로 우주를 알아가고 병을 고쳐간다고 해도 죽음만큼은 정복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움직임을 통제 할 수도 없고 질병을 막을 수 없으며 미래를 알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은 결국 창조주의 피조물로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알 때 피조물로서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임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속한 자라는 신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생명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 사건에 눈을 뜨게 되면 지금까지 붙들어 왔던 생존의 문제 대해서는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생존보다 생명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에 생명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베푸신 최고의 은총으로 다가옴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의 잘못은 생명을 말하면서도 생존에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에 생존의 문제까지 더하여 하나님을 영과 육을 잘되게 하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한 신앙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만이 우리의 참된 기쁨이고 충만이며 만족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이미 생명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더 베풀어져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이미 생명의 완성에 있기 때문에 부족한 것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충만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서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생존의 세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늘 불평과 함께 부족함을 느끼며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내용들은 헛되고 공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에 도움이 되거나 힘이 되는 내용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생명은 믿음으로만 알아가고 믿음에 의해 생명의 울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리게 되는 하늘의 복입니다.
10절에 보면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충만입니다. 우리를 충만한 상태로 만들어 주기 위해 뭔가를 많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충만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임을 안다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존의 문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것은 건강과 함께 평안입니다. 건강하고 평안한 인생만 보장된다면 원하는 것이 없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누구나 다 죽는 거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가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죄와 죽음의 모든 제가 해결되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부로, 충만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가장 존귀한 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라고 입을 벌려 외치는 교회가 항상 더 채우고 싶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이고 낮추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한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도 해결 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쁨이고 감사며 찬양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세상 모두가 걸어가는 죽음의 길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신다면 그리고 그 의미를 아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이나 현재의 삶에 대해 조급해 하지도 실망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가장 좋은 것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께 함께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현재의 삶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답답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 한마디로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압니다. 답을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 여러분이 보지 못한 완성을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앎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