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쓰시오’라는 문제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쓰시겠습니까? 아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쓸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정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일 수 있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은혜 밖에 있었던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까지 나아간다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자기 구원으로 머문다면 맞는 답이 아닌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를 쓰시오’라는 물음이 있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에는 아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답을 가장 많이 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세워진 이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정답일 수 있고 정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 하시고 거룩한 자녀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함으로 교인 수가 증가되는 것을 기대하거나 그러한 의도가 담겨 있다면 정답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양성이 있지만 통일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통일성은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말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모두가 저주에 속한 죄인이라는 것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성 안에서 우리가 주장할 수 없고 하나님께 인정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행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의한 행함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함은 부인 받아야 하지만 믿음에 의하고 성령에 의한 행함은 인정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함을 누가 어떻게 인간에 의한 것과 성령에 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분을 위해 하나의 기준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인간이 평소 생각하고 있는 성령의 행함, 즉 선행과 신앙적 실천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곧 행함을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차별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교회의 하나 됨 또한 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주셨고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선물을 받는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께 선물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복에 참여된 신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복에 참여된 신분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자는 복을 추구하기 위해 예수를 좇는 자가 아님을 의미하기에 복을 추구하기 위한 신앙과 구별되어 시작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았는가?’라며 선물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도무지 선물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의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하시겠습니까? 선물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먼저 일까요 아니면 선물을 받을 수 없는 나에게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한 감격과 고마움일까요? 후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동일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자신이 도무지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식하는 가운데 고백됩니다.
교회에서 드러나는 잘못 가운데 하나는 각기 자신이 받은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선물에 관심을 두고 누구의 선물이 더 크고 좋은지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저울질 합니다. 다른 이가 누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 선물에 관심을 둠으로 나타난 폐단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폐단을 부추기면서 성도의 열심을 촉구합니다. 열심이 있어야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에 있게 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많이 받게 된다는 말로 교회의 하나 됨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선물의 분량대로라는 것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다름을 뜻합니다. 각기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선물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때문에 각기 다르다는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하다는 통일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통일성을 드러내는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를 의미하지만 연합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선물의 가치에 마음을 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하나 됨이 지켜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은 우리의 연합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케 하심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차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차등을 두는 것일까요? 하늘의 상급에도 차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선물에도 차등을 둡니다. 좋고 나쁨에 대한 상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선물도 좋고 나쁨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에 나쁜 것은 없습니다. 조금 좋고 많이 좋은 차이도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선물을 받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물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나의 공로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는 고백으로 교회의 하나 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광, 나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내가 어떤 선물을 받았는가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선물의 목적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선물에 차등이 없다면 믿음에도 차등이 없으며 구원에도 차등이 없습니다. 신자가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인한 영광은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신자는 자신의 행함에서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앎으로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을 것을 강조합니다. 이미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으며 그 선물은 세상의 무엇보다 가치 있는 귀한 것임을 가볍게 취급합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어떤 복을 누리고 있는지도 간과하기 때문에 항상 현재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는 것에 신앙의 목적을 두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좋은 것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미 여러분은 좋은 것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주에 속한 자가 건짐을 받은 것이고, 저주 아래 있게 한 모든 죄가 용서된 것이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요? 교회는 모두가 이 선물을 받은 자로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차이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가치를 보는 자로 사는가에 있습니다. 하지만 선물의 가치에 눈이 열리고 선물로 인한 기쁨과 감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선물로 가치를 알든 모르든, 감사가 있든 없든 교회로 모인 우리 모두는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선물을 받은 자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무엇으로도 선물의 가치를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물이 주어진 것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인 것입니다. 그것이 선물을 받은 자로 모이는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간에게 초점을 둠으로 인해서 이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 즉 하나 됨은 그리스도의 선물이 어떤 은총의 결과이며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에 눈이 열릴 때 자연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 됨으로 드러나기 위해 교회는 훈련되고 세워져 갑니다. 교회의 풍성함은 교인 숫자도 재정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이 곧 교회의 풍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로 세우신 교회를 이처럼 풍성함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미약함이 아니라 창대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루어야 할 창대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선물로 주신 창대함을 마음껏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