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레 19:23)
성경 통독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최대 위기 관문은 ‘레위기’라는 말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등장하는 제사 규례와 수많은 율법은 도무지 현실에 적용할 수 없어서 이해의 한계에 부딪히고 흥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성경을 통독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레위기라는 높은 벽을 만나 포기하거나 마지막에 읽을거리로 미루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레위기를 읽어라.’’라는 말도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본문도 우리 실력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 앞에 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고 말씀인데 이 말씀 안으로 들어갈 틈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가 말씀의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이다.
레위기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드리라’(레 1:2)라는 시작의 말씀부터 사랑과 긍휼을 말한다. 예물의 종류를 이스라엘 자손의 자유의사에 맡긴 것이 아니라 소나 양으로 선택하시고, 소나 양을 예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제사는 이스라엘 자손의 허물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제물의 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증거된다. 그리고 제사는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고 세상에 없는 사랑과 긍휼을 확증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참된 제물이기에 인간이 자기 뜻대로 들고 온 제물은 거절하신다.
레위기의 중심 주제가 사랑과 긍휼이라면 본문은 그러한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가서 각종 과목을 심었을 때 그 열매를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삼 년 동안 먹지 말라는 규례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느냐는 것이다.
이 규례대로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과목을 심는다 해도 다섯째 해가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먹을 수 있다(레 19:25).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생존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먹고살라는 것인가? 따라서 본문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생계 문제는 외면한 횡포에 더 가까운 규례로 말해야 할 정도다.
우리가 이 규례를 실천한다고 생각해보자. 땅을 사서 처음 농사를 짓는다 해도 삼 년 동안 열매를 먹지 않고 버릴 사람도 없거니와 실천한다 해도 모든 성도가 땅을 사서 과목을 심어야 한다는 조건이 요구된다.
설령 모든 것을 실천했다 해도 이 규례의 문자적 효력은 다섯째가 되면서부터는 상실된다. 다섯째 해부터는 열매를 계속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담긴 비밀, 즉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로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기존의 사고 그대로 레위기를 보기 때문에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할례를 언약의 증거로 받은 이스라엘을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땅인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이스라엘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구별은 곧 거룩함을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타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방식 그대로 존재한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애굽으로 간주 되어 심판받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 즉 부정한 것으로 여겨 삼 년 동안 먹지 말라는 규례 앞에서 ‘그렇다면 삼 년 동안 무엇을 먹고살라는 것인가?’라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보다 자신의 생계 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사를 짓지 않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로 먹이신 은혜를 잊었다는 뜻이 된다.
가나안 땅에서는 자기 손으로 심었다고 해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심은 것이 자기 것이 되고, 자기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애굽 방식이다. 자기 힘으로 살고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것이 애굽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하라’라는 규례를 주심으로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살게 하는 삶의 방식을 삼 년 동안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할례받지 않은 것을 받지 않으신다.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는 것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다섯째 해에 비로소 열매를 먹게 될 때 그 열매는 자신들의 손으로 심고 거둔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된다. 굶어 죽는 것이 마땅한 자신을 먹이시고 살리신 사랑과 은혜의 열매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애굽에서 인도받은 이스라엘에 있어야 할 마음 자세다.
하지만 이것을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라’라는 결단을 요구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애굽의 본성으로 존재하는 인간 된 우리가 모든 것을 은혜로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긴 상태에서 염려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규례라 해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실천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죄는 애굽을 자기 본질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죄를 알지 못한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들의 피로 죄를 속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이 잘되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 자신을 애굽으로 여기는 자가 심판의 존재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이고 본문이기 때문에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확인된다고 믿는 자에게 레위기는 물론이고 모든 성경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레위기로 증거되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죄인 되게 하는 사랑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