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단 5:5)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기록된 책으로 되어 있고 우린 그것을 성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신비한 기적과 사건들,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내용을 접한다. 글자는 글자일 뿐 글 자체가 은혜와 감동을 주는 어떤 효력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성경을 읽었다’라는 성과로만 남는다.
비록 성경을 하나님이 예언하신 거룩한 말씀으로 믿고 수십, 수백 번을 읽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실감하고 확신하게 하는 특별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내용을 읽을 때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실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불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신 내용을 읽어도 하다못해 뱀 새끼라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긴 성경의 등장하는 사건을 현재에서 실제로 경험한다면 무서워서 읽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이 글자로만 주어져 있고, 글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가지기도 한다. 성경을 사실로 믿고 확신할 수 있는 특별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착각이다.
그러면 본문의 이야기처럼 실제로 공중에 손가락들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것을 목격한다면 어떨까?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했다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간증으로 자랑할까? 아니면 손가락이 쓴 글의 내용에 집중할까? 만약 손가락이 쓴 글자가 여섯 개의 숫자라면 생각은 복권을 사는 것으로 향할 것이다. 손가락이 나타난 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특별한 계시의 증거로 믿는 것이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목격한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 은그릇으로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던 벨사살의 얼굴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히는 반응을 보인다. 신비하고 신나는 경험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벨사살은 누구든 글자를 읽고 해석하면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하지만 왕의 지혜자가 다 동원되었는데도 손가락이 쓴 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혜는 무능할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이든 성경책으로 보는 글이든 인간의 지혜로는 읽고 해석할 능력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인간이 읽고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글은 인간의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로 해석되지 않는 글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비록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일이 없다고 해도 이미 신비로운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본문을 지금의 현실에서는 경험되지 않는 성경 속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비록 실제로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지는 않는다 해도 그것처럼 세상에 없는 방식과 현상으로 하늘의 글을 우리 속에 쓰고 새긴 사건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세상에 남긴 십자가가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벨사살에게 나타난 손가락과 같다.
그런데 인간은 얼마든지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확신한다. 또한 십자가를 잘 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간의 손에 죽으신 십자가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 흘리신 이야기를 평생 교회를 다니며 읽고 듣는데도 단지 성경책을 읽는 것으로 끝난다. 성령이 손가락이 되어 내 속에 글을 쓰고 남기는 말씀의 경험이 없으니 자신이 만족할 눈에 보이고 몸으로 체험하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이다.
교회가 십자가를 말한다 해도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사랑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바른 해석이 아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함께 언급되는 은혜도 사랑도 하나 같이 인간을 중심에 둔 해석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과 무관한 다른 십자가라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다니엘은 손가락이 쓴 글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읽고, ‘끝났다(메네), 끝났다(메네),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다(데겔), 나라가 나뉜다(우바르신)’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날 밤에 벨사살이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한다.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은 바벨론의 권력자인 벨사살의 죽음, 곧 심판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다.
다니엘이 해석을 하기 전에 벨사살이 성전에서 탈취한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즐긴 것을 느부갓네살처럼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을 행한 것으로 책망한다.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쓴 것을 성전의 금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면서 자신이 유다의 하나님보다 위에 있다고 과시하는 것을 마음을 낮추지 않은 벨사살의 행악임을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벨사살은 바벨론으로 유다를 망하게 하고 성전을 무너뜨린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유다에게 남기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임을 모른다. 그래서 유다를 지배하는 현실이 자신들의 힘으로 되어졌다고 여기고 그 힘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낮추지 않은 행악으로 간주 되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이고 이것을 아는 다니엘이 벨사살이 끝났다는 내용으로 해석한 것이다.
다니엘의 해석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지 않은 모든 인간은 끝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해석이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해석만 나온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이 자신을 이미 끝난 심판의 존재로 보신다는 해석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를 읽으면 자신의 저주와 죽음이 아니라 죄 용서와 구원으로만 해석한다.
십자가에 의해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지적되고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드러나며 말씀을 이루신 주의 의를 의지하고 자랑하게 된다면 그 심령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고 성령의 지혜로 인한 바른 해석에 의한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