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 4:24)
현대 교회의 실상은 ‘십자가는 있는데 죄인은 없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예배당은 물론이고 기독교인 집 안에도 목에도 십자가는 차고 넘치는데 정작 죄인이 없다. 입으로는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 사랑을 말하는데 죄를 모른다. 죄는 없고 오로지 구원을 위한 용서, 은혜, 사랑의 십자가만 있다.
사도는 십자가를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의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는 데 듣는 이들은 분노는커녕 불편해하는 기색조차 없다. 오히려 감격하는 표정으로 쉽게 ‘아멘’ 한다. 사도 시대와 다르게 지금의 기독교인이 믿음이 더 좋아서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유는 걸림돌이 제거된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다. 죄가 빠지고 용서와 사랑만 있는 십자가를 말하고 들으니 마음이 불편할 이유가 없다.
죄가 빠진 십자가는 주와 함께 죽는 죽음이 없다. 예수님의 죽음만 있고 나의 죽음이 없는 십자가는 이미 십자가가 아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있는데 죄인이 없다’라는 말이 현대 교회의 실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이 예수님의 용서에 감사하고 끊임없이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이상하고도 희한한 교회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 사건 앞에서 인간의 가치, 존귀함은 없다. 단지 죽음이 마땅한 저주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인간을 죽이신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모세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죽이려 했다는 내용도 하나님과 저주의 존재인 인간관계에서는 당연히 행하실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세를 죽이려 하신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모세가 죽임을 당할 범죄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은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라며 애굽에 가지 않으려는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하시고 손에 나병이 생기고 다시 낫는 기적의 체험도 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모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겠다고도 하신다.
그리고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시며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으니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께는 모세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다. 죽일 자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애굽을 향해 가는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가?
모세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만한 범죄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은 위대한 지도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세가 무엇을 행하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든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죽임을 당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에서 모두 드러난다.
모세는 애굽으로 가라는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출 3:10)’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다’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불신앙이며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지를 저울질하는 범죄다. 따라서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신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다. 이것을 대개 애굽을 인도할 모세에게 주신 권능의 지팡이로 말하지만 본래 모세의 손에 있던 것이다(출 4:2). 이 지팡이를 하나님의 권능이 모세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세가 지팡이로 행한 이적 때문일 것이다.
애굽에 재앙을 내리실 때 지팡이를 들어 나일강을 쳐서 피가 되게 했고,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하나님이 우박을 보내셨고, 아말렉과 싸울 때 지팡이를 든 손을 들면 승리하고 내리면 패한 일도 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홍해 바다가 갈라지게 해서 건너게 된 사건 등등이 지팡이를 하나님을 대리하여 권능을 행하는 표적으로 바라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지팡이를 손에 든 모세를 하나님께 권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대리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지팡이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권능의 지팡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닭 울음소리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신 것은 애굽에 가는 것을 불안해하는 모세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모세의 힘은 필요 없다. 이스라엘을 애굽이라는 사탄의 나라에서 구출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이 모세를 보내신 취지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뱀, 즉 사탄의 속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에 나병이 생긴 것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모세를 똑같이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피는 죽음의 존재인 모세를 죽음의 땅으로 보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세의 행보는 결국 우리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로 저주받은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은 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애굽으로 보내시지 않았다. 사탄이 지배하는 저주의 땅에 인간의 지도력, 능력,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죽음의 존재 그대로 가면 된다. 모세는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길을 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으로 죽임을 당할 죄인으로 가야 할 길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피에 있다는 것을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말하자 여호와가 모세를 놓아주신 것으로 미리 보여준다.
피 남편은 할례로 연결된다(출 4:26). 할례, 즉 언약의 피가 죽음에 있는 자를 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 인해 장자 재앙의 죽음에 구출되는 사건으로 연결된다.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의 피로 만드신다는 하나님의 취지를 전달하기 위해 모세를 죽이려 하시고 피로 인해 놓아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