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0 12:25

막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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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10)

 

교회에서 찬송은 주를 경배하고 높이기 위한 중요한 믿음의 행위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송으로 경배하고 높이며 영광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이유로 경배와 찬송은 교회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믿음의 행위로 굳게 정착되어 있다. 예배 전에 여러 명이 강단 앞에 나와 기타, 전자 올갠, 드럼 등의 악기와 함께 요란하게 찬송을 인도하는 것도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의 찬송으로 주의 이름이 높여지고 영광이 되는가?’이다. 사람들은 찬송을 당연하고도 옳은 신앙생활 중의 하나로 알고 있기에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찬송으로 주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아니라면 열심히 찬송한다 해도 결국 헛된 일로 끝난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찬송을 주가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무엇으로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찬송이 주와 연결된 것인가? 두 손을 좌우로 흔들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찬송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주를 알고 감사하는 믿음 때문인가? 중요한 것은 주를 높이고 경배하기 위한 찬송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고 믿는 주가 어떤 분인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가 다르다면 찬송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신 주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이 호산나하며 찬송한다. 자기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열렬히 환영한다. 이것을 예수를 따르는 믿음으로 말하기 전에 그들이 예수를 누구로 알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을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저주받기 위해서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를 찬송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말이다.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로 찬송하며 환영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호산나하며 찬송하는 무리가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로 알았을까?

 

 

설령 십자가에 죽으시는 메시아로 알고 찬송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해당하는 자는 십자가 앞에서 죄를 지적받고 죄인으로 주와 함께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을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는 자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용서는 자기 구원을 위한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찬송한다면 결국 자신을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자기 사랑에 의한 찬송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찬송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과거 다윗 나라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로 알고 환영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말이 그들의 관심이 예수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심으로 인해 이루어질 예전의 다윗 나라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찬송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가 아니라 그들이 소망하는 다윗의 나라에 마음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십자가와 상관없는 다른 예수를 생각하고 찬송한 것이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찬송한 이유도 그러하다. 주의 일을 하기 위해 주의 이름으로 온 메시아로 믿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소망하는 주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다윗 나라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구원이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인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알고 찬송한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들의 모든 관심은 자신들의 구원에 있었고,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 또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현대 기독교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고,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찾는 하나님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부르며 찬송하는 미련하고 무지한 인간으로 드러내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다.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아마 예수님이 행한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을 놀라운 능력을 갖춘 메시아로 생각한 것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메시아만 오신다면 로마의 압제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이 끝나고 예전 다윗의 영광을 누리며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호산나하며 열렬히 찬송한 이유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낮아진 자리에서 낮아진 길로 가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고 찬송한다면 자신 역시 낮아지는 길을 가야 할 자로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 그런데 높아짐을 꿈꾸는 인간으로의 찬송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찬송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가 높아짐을 바라보며 예수를 찬송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자기 의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하지만 구원은 저주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저주받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는 반드시 인간을 저주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저주 아래 있는 자로 보지 않는 자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따라서 죄를 책망받고 저주받은 자로 주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의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고 감사하는 것이 성도가 부르는 호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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