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8:7-10>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080710.mp4
<본문>
7.이스라엘이 아닌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남아 있는 모든 자
8.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않았으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역꾼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으되
9.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은 군사와 지휘관의 우두머리들과 그의 병거와 마병의 지휘관들이 됨이라
10.솔로몬 왕의 공장을 감독하는 자들이 이백오십 명이라 그들이 백성을 다스렸더라
<설교 요약>
성령을 받고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멀리하고 이기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존재하고 역사한다면 그 능력으로 죄가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인데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취지를 무시한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이유와 목적을 인간의 유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결과가 사망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능히 알고 있는 당연한 말로 여기고 깊은 생각이 없이 넘깁니다. 그로 인해서 매일의 현실이 죄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그러한 자기 현실에 대한 자각이 둔합니다.
‘삯’은 대가, 보수를 뜻합니다. 일한 자에게 지급하는 대가를 말한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죄의 삯은 계속해서 죄에 거한 자, 다시 말해서 날마다 죄를 행한 자에게 지급하는 대가, 보수가 사망이라는 뜻이 됩니다. 죄의 종인 우리가 매일 죄에 충성하면서 일해온 대가로 사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했든 모두가 악한 것일 뿐이고 오늘 죽이신다 해도 우리가 일한 것에 대한 당연한 삯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살아 있고, 또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기 전에 ‘죄의 삯으로 이미 사망을 받아야 했을 죄의 종을 오늘도 살게 하시는 주의 뜻을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먼저입니다.
죄의 삯을 사망으로 말한 바울이 이어서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날마다 죄를 행하는 자에게 주어질 삯이 사망인데,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굳이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 안에 있는 영생의 은사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귀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죄의 삯으로 사망을 받아야 할 자를 살게 하시는 뜻은 매일 같이 죄의 종으로 행하는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마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묵과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남아 있는 모든 자들을 역꾼으로 삼아 건축한 것을 말합니다. 역꾼으로 삼았다는 것이 강제로 노동시켰다는 뜻임을 생각하면 가나안 족속인 이들은 솔로몬의 통치 아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때 그 땅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일에서 시작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거주하면서 노역하는 종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지 않고 남겨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범죄입니다. 그런데 이들 자손이 솔로몬의 건축에 역꾼으로 쓰였다면 결과론적으로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잘한 일이 됩니다.
또한 성경에는 명령을 어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장차 솔로몬의 건축에도 도움 될 것을 아시고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것을 묵인하셨다고 해야 할까요?
삿 2:21절을 보면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않고 남겨둔 이방 민족을 하나님도 쫓아내지 않고 그냥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삿 2:22). 이 말씀도 우리에게 의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지 않아도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지 않을 것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시험하시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시험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앞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일에 이방 민족이 사용되는 것이고, 그 이유로 남겨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 역시 이방 민족과 같이 여호와께 범죄하는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지 않고 군사와 지휘관의 우두머리들과 그의 병거와 마병의 지휘관들이 되게 합니다. 또한 공장을 감독하는 이백오십 명을 두어 백성을 다스리게 합니다. 다스리는 백성들 가운데는 역군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은 역꾼으로 삼은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자손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은 가나안 족속은 자신이 다스려도 되는 힘없는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에게 다스림을 받던 때와 같습니다. 당시 애굽도 이스라엘을 힘없는 약자로 여겼고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조차 조롱하였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도 마지막도 실패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광야 생활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실패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약속의 땅에 인도해 가심으로 쓸모없는 존재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혜택이 입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우리도 실패자입니다. 외적으로는 지혜와 부로 명성을 떨치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힘으로 착각하는 실패자입니다. 이러한 실패가 하나님이 쫓아내지 아니한 이방 민족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쓸모없는 우리를 남겨두시고 살게 하시는 취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살게 하신 대로 살면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죄를 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죄를 사하시는 용서의 능력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