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9:29-31>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092931.mp4
<본문>
29.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0.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십 년이라
31.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설교 요약>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진지하게 보지 않는다면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지식과 상식의 눈으로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복과 은혜로 생각되는 내용에 눈길을 두고 같은 복과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신앙생활에 중점을 둡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서 지금 기독교인의 믿음에서는 성경의 중대한 원칙으로 자리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활동을 얼마나 했는가를 믿음의 증표로 삼고 복을 받는 믿음으로 강조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심은 솔로몬이 누린 부에 대한 부러움으로 드러납니다.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나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함께 주셨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솔로몬처럼 바른 기도를 하면 부도 함께 주시지 않을까?’라는 헛된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빠진 믿음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부와 평안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성취된 십자가만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피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일 뿐 그 외의 것을 바라고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활동하지 않습니다.
13절을 보면 솔로몬의 세입금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라고 말합니다. 세입금 외에도 무역상, 객상들이 가져온 것과 아라비아 왕들과 그 나라 방백들이 가져온 금과 은이 있습니다.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금으로 큰 방패 이백 개를 만들고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듭니다.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순금으로 입히기도 합니다. 용도는 자기 힘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모든 왕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크다고 말합니다(22절).
이처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부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복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잤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죽는다’라는 피할 수 없는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길 수 없는 권세가 우리 인생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합니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29절) 라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행적이 어떠하든 그의 행적과 부와 영광으로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사십 년입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놀라운 번성을 이룹니다. 세상은 이러한 업적을 높이고 칭송합니다. 세상이 위인으로 칭송하는 수많은 인물 또한 행적과 업적에 초점을 둡니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인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저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적과 업적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인이라 해도 결국 저주받은 자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저주라는 인간의 운명을 간과하고 십자가를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죄를 용서하시는 십자가는 사라지고 교회라는 기독교 종교를 나타내는 간판 역할로 전락할 것입니다. 교회 부흥과 인간의 복을 위해서는 쓸모없는 십자가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사 된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이 있음에도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 되었다는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죽음에 함께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의 죽음은 인간의 일반적인 죽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 1:6절을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말합니다.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야의 아내로 말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야라는 이름 앞에서 다윗은 수많은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을 강건하게 한 영웅적인 왕이라 할지라도 밧세바와 동침한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을 범한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의 닭 울음소리와도 같습니다.
우리야라는 이름은 다윗의 모든 행적과 업적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의 운명을 저주로 드러냅니다. 저주의 심판이 다윗의 운명이라는 것은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처음 아들을 하나님이 죽이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의 혜택을 입었다는 증거로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 이름의 공통점은 저주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이름이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로지 십자가로 이루신 용서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입니다.
다윗의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의 죽음이고 언약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다윗의 성에 장사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 매장되었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언약의 죽음에 참여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저주의 인간이 어떤 죽음, 누구의 죽음에 참여하는가로 운명이 결정되는지를 증거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적과 업적이 아무리 영웅적이라 해도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되지 않는다면 부활의 생명에서 단절된 운명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증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