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0:1-5>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00105.mp4
<본문>
1.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2.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낯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 일을 듣고 여로보암이 애굽에서부터 돌아오매
3.무리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4.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5.르호보암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설교 요약>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증거되고 높임 받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입니다.’라고 말하면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만인에게 전파하고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희생과 공로는 그런 방식으로 증거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공로가 증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공로는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고, 그 일은 인간이 죄인 되는 것으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실천하는 열심 있는 믿음의 삶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낸 거짓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의롭다고 함을 받을 요건이 전혀 없는 인간의 죄를 아들의 피로 용서하시고 구원받게 하시는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십자가를 무시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우상일 뿐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은 헛된 망상임을 깨닫고 그러한 망상 속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음을 말해왔던 모든 것이 악함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므로 나타나는 증거물이고 우리를 이러한 악한 자로 드러내어 자랑할 공로가 없는 자로 십자가 앞에 세우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자기 부족을 충족하는 일에만 마음을 둡니다.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에게 아버지가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면 왕을 섬기겠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요구도 이러한 인간 됨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왕은 섬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곧 왕도 하나님도 자기 부족을 충족하여 만족을 이루기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제도는 백성들의 요구에 의한 것입니다. 이들이 왕을 요구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무엘이 늙어가고 그의 아들들이 바르게 행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스라엘, 즉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처럼 왕을 세우면 자신들의 나라도 왕을 중심으로 굳건히 세워지고 번성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을 요구한 이유는 자신들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위해 일할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를 힘들게 하는 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을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삼상 8:7). 하나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 르호보암을 향한 이스라엘의 요구입니다.
1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왕을 섬기겠다고 요구하는 것도 온 이스라엘로 말합니다(3절). ‘온’은 모두, 전체, 완전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세겜에 모였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각 지파의 백성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세겜으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모였든 모이지 않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온’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에게 한 요구가 곧 인간의 본질과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왕을 섬길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됨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을 섬길 자는 없다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해 왕을 요구하고 이용하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온’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개인적인 일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국가의 의미로 존재하고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워서 현재의 우리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 모두가 이스라엘이 보여준 죄의 모습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는 점이 ‘온’을 의미한다는 것을 꼭 주지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사정과 형편은 각기 다르다고 해도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한다는 점에서 ‘온’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개인은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다르고 복이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하나고 은혜도 하나고 복도 하나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해당하지 않고 오직 심판이 마땅한 죄의 자리에서 증거되는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는 세상의 시각에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의 일은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이것을 기대하고 왕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왕이 백성의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다가 왕을 위해 일하게 할 것임을 경고합니다(삼상 8:10-17).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자기 요구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보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현재 모습으로 생생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렘 31:33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법을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속에 두고 그들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은 의롭다 함을 받을 요건이 없는 자를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 언약의 성취를 깨닫게 하고 주의 일을 높이고 감사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세계는 이렇게 증거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죄에서 주의 희생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