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0:16-19>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01619.mp4
<본문>
16.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7.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18.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하도람을 보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설교 요약>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난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 해도 성경이 아니라 세상 윤리와 기독교 종교 상식으로 판단한 죄가 전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토해내어야 할 죄는 없고 행함의 부족한 부분을 죄로 인정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가 있는 것을 죄를 인정하고 마음이 낮아지는 겸손한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좀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시도하는 인간의 노력이고 행함이며 성경은 이것을 죄로 말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믿음의 행위로 알고 있기에 죄 아래 있는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착각에서 깨어나 성경이 증언하는 바른 믿음의 세계로 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시는 일이 환경을 인간이 싫어하는 상태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나는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힘쓴다’라며 자기 믿음에 자신감을 드러낸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의 환경과 육신이 힘들어지는 상태에서 그 믿음과 자신감은 변함없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원하지 않은 환경이 주어지고, 그 환경에서 인간으로서의 악한 본색이 유감없이 드러남을 통해서 ‘믿는다’라고 자신했던 것이 죄였음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를 위해 주를 배반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솔로몬이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다고 선포하자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르호보암을 떠나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19절에서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역대하의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없는 상태인데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의 배반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사라졌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배반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백성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속성이 아니라 유다 백성에게서도 나타나는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으로 그 범위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속성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한 일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계속되는 것이고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간에게 과연 믿음이 가능한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배반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배반한 이유는 백성의 요구를 거절한 것인데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15절) 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배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멍에를 가볍게 해줌으로 삶의 질이 나아진 세상을 기대했었는데 이 기대를 무너뜨림으로 배반이라는 본성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배반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 됨을 폭로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이라는 왕이 아니라 다윗의 집을 배반했다고 말한 것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집은 다윗 혈통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집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집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집을 배반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가치를 무시하고 등을 돌린 것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언약보다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보이는 세상이 주는 이익을 더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배반은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일종의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다윗의 집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고집입니다. 르호보암이 역꾼의 감독 하도람을 보냈을 때 그를 돌로 쳐 죽인 것도 자기 뜻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결코 자기를 포기할 뜻이 없고 포기하지도 않는 존재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한 인간으로 믿음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좋은 환경의 세상을 살기 위해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내가 믿음으로 인정했던 모든 것이 가치 없는 헛된 것으로 무너짐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만을 의지하게 됨을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두가 주를 배반해도 나는 절대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주와 함께하겠다는 베드로의 결단과 강한 의지의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위태로워지는 환경이 되자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반합니다. 이것이 평안할 때는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배반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항상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주를 배반하는 용서 받지 못할 자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원하지 않은 환경에 있게 합니다. 주를 배반하게 하면서 배반자인 우리에게 용서의 은총을 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