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1:5-12>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10512.mp4
<본문>
5.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유다 땅에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6.곧 베들레헴과 에담과 드고아와
7.벧술과 소고와 아둘람과
8.가드와 마레사와 십과
9.아도라임과 라기스와 아세가와
10.소라와 아얄론과 헤브론이니 다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들이라
11.르호보암이 그 방비하는 성읍들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지휘관들을 그 가운데에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12.모든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매우 강하게 하니라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설교 요약>
세상은 죄를 인간의 행함에 따라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 질서를 위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행함을 선악으로 구분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죄로 규정하여 통제하지 않으면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죄를 규정하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세상으로서는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러한 시각으로 죄를 이해한다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오류에 부딪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세상처럼 행함을 선과 악으로 구분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에 선과 악으로 구분한 행함에 경중의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같은 시각에서 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도 얼마든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인간의 행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를 행함에서 찾는다면 선악과를 먹은 죄는 그러한 행함이 있는 아담으로 국한되어야 합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는 없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었다는 징벌도 그러한 행함이 있는 인간에게 국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 즉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합니다(롬 5:12).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 안에서 죽은 자로 있는 것입니다. 행함의 여부는 따지지 않습니다.
세상처럼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하고 선한 행함이 있는 자를 구원받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칭찬한다 해도 아담의 죄를 지어 죽은 자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행함을 선악으로 구분하고 선한 행함을 믿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심판받을 자라는 하나의 인간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선악과를 먹은 행함이 아니라 사탄이 존재하는 어둠의 세상이라는 환경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행함과 관계없이 어둠이라는 환경 속에 있었던 것이고, 현재의 우리 역시 아담과 같은 어둠의 환경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규정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둠의 환경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하는 것 모두가 죄를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비록 옳고 당연한 일로 주장한다 해도 성경 안에서는 죄로 드러납니다. 인간은 죄의 속성을 가진 자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를 본문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르호보암이 여러 곳에 견고한 성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8장을 보면 솔로몬도 여러 곳에 국고성과 견고한 성읍들을 건축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미 견고한 상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르호보암은 무슨 이유로 많은 곳에 견고한 성읍을 더 건축한 것일까요?
솔로몬이 다윗에게 물려받은 이스라엘은 강한 나라였습니다. 다윗이 전쟁으로 많은 나라를 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는 천하에 솔로몬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를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은 부국강병의 나라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곳에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고 모든 성읍에 전쟁 무기인 방패와 창을 두었다는 것은 자신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 지파가 여로보암에게로 간 상태에서 자신의 세력이 더 약하다는 불안감에 의한 건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르호보암에게서 나타나는 죄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시각으로는 왕으로서 당연한 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 나라의 왕도 다르지 않습니다. 르호보암의 죄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방 나라의 왕이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간주한 것처럼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삼하 7:12절에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나라, 르호보암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나라로만 존재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윗 언약의 나라입니다. 언약으로 시작하여 언약으로 마치는 것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을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자신의 나라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이스라엘과 싸워서 나라를 회복하여 자신에게 돌리려 한 것입니다. 자신이 왕으로서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분열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 나라를 아버지 때보다 더 성장시키고 부강하게 해서 왕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가 개입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생각했고 다스렸다는 사실이 그가 어둠이라는 환경에 있음을 증거하는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르호보암과 같은 악함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어둠의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나에게 있는 나의 것을 더 확장하여 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르호보암의 어둠의 속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나의 교회로 인식하고 부흥시키고자 하는 것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신 언약의 나라이니 너의 나라로 생각하지 말라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다’라는 말을 전한다면 받아들일까요? 인간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죄가 우리 안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어둠이 우리가 거하는 환경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우리가 거한다면 내가 나를 위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책임지기 위해 한 분이 오셨다는 것이 기적이며 복입니다. 복을 알리기 위해 성경은 우리 안에서 죄를 끄집어내고 죄에 거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