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7 15:08

(49강)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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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대하 11:18-23

대하 11:18-23>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1182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으니 마할랏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

19.그가 아들들 곧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았으며

20.그 후에 압살롬의 딸 마아가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가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더라

21.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22.르호보암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웠으니 이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삼아 왕으로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23.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더라

 

<설교 요약>

성경이 지적하는 죄는 단순히 살인이나 사기처럼 사회 규범을 위반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반사회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행함에서 드러나는 죄악성을 단호하게 죄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죄를 알게 되면 우리가 죄를 놓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에 따라 죄를 외부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을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따라 특별히 교회, 또는 하나님에 대해 반대하는 행위를 원수 된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벗 된 삶에 중점을 둔다면 하나님의 원수 된 죄악성은 우리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얼마든지 드러난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야고보는 세상과 벗 된 것을 두고 간음한 여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평범한 일상이라고 해서 사소하다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가벼운 죄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혹여 일상생활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긴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행하는 것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본문도 시대와 상황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만 내용에서는 우리와 같은 본심에서 나오는 행함을 보게 됩니다. 남자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에게로 마음이 향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렸고 그들에게서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습니다. 거느리는 여자가 모두 일흔여덟 명이고, 아내 가운데는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이 있고, 압살롬의 딸 마아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여인 가운데서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합니다. 이것은 르호보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남자의 본심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아들 문제도 비록 아들을 낳은 아내는 여럿이라 해도 한 명 한 명으로는 모두 르호보암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장자가 왕위를 이어가는 원칙을 깨고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웁니다.

 

 

본문을 보면 마할랏을 아내로 삼고 그가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은 후에 마아가에게 장가들어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낳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아비야가 장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 마아가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내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이고 자식도 하나 아니면 둘을 낳은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르호보암의 상황과 관계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같은 상황이 아니라 해도 르호보암이 보여준 본심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와 관계된 모든 이를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어느 부모에게 아들이 둘이 있는데 첫째는 공부는 하지 않고 사고만 쳐서 부모에게 항상 근심거리가 됩니다. 반면에 둘째는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업을 가져 자랑거리가 됩니다. 이런 경우 둘 다 같은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율법에 장남에게는 유산을 두 몫으로 상속하라는 규정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가 장남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명령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남을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둘째 아들이 더 자랑스럽게 여겨진다면 그 법에 따르기를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심이, 법이나 질서 이전에 사랑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사랑하는 아들에게 더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율법의 명령에 따라 미운 아들에게 두 몫을 준다 해도, 그것이 참된 순종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본심은 여전히 자기 뜻을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외형적으로 말씀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순종의 신앙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곧 세상과 벗 되어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이라고 해서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라 해도 그가 장자면 장자로 인정하여 두 몫을 주라는 것입니다(21:15-17). 이것은 평범한 가정의 일상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심으로는 지킬 수 없다는 사실로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자기 본심대로 장자가 아닌 마아가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족보를 보면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1:7)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후계자로 세운 아비야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운 일을 승인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므로 의롭다 인정받아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없습니다. 족보에 이름이 있는 것은 인간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따른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고 야곱은 여러 아들 중에 노년에 얻었다는 이유로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이 사랑한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나 감정에 맞추어 일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심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본심을 드러내어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이루신 주를 바라보는 성도로 세워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파고들어 은밀한 본심을 드러내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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