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2:9-12>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20912.mp4
<본문>
9.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10.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의 손에 맡기매
11.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호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경호실로 도로 가져갔더라
12.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
<설교 요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처럼 자기 부족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그것을 자신의 결함으로 인정하는 것을 겸손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온전하다고 말하면 그를 교만하다고 판단하며 '완전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 아래 ‘예수님 외의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자요, 완전에 이를 수 없다’라는 것이 기독교인의 입장입니다. 마치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이 깨어진 항아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간을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열심히 물을 부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밑이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존재이고, 깨어진 것은 고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아무리 물을 붓는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열심히 물 붓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로 말하는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이지만, 자신의 결함과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완전함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진리를 추구하는 선한 열정과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사랑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선함을 부각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르호보암의 겸손함과 유다의 선한 행위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유다를 완전히 멸하지 않으신 이유를 그들의 겸비함과 선한 행실에서 찾으며 우리도 겸손과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노를 돌이키시고 다 멸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은 겸비한 인간에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선함이 부각 되는 해석으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이 자신의 겸비함으로 인해 전면적인 멸망을 면했으니, 그의 믿음은 성공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멸망을 완전히 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여호와께서 다 멸하지 아니하셨다"라는 말씀은 해석에 어려움을 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의 겸비함을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셨다면, 그에 대한 응답으로 완전한 구원이 뒤따라야 타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의 겸비가 온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실 이유도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우리는 겸비함과 하나님의 긍휼, 그리고 그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를 다시 묻게 됩니다.
성경은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의 행적을 보면 그 겸비가 진정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 그리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까지 모두 빼앗은 이후 르호보암의 대응은 겸손함보다는 체면을 유지하려는 모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금 방패 대신 놋 방패를 만들어 경호 책임자에게 맡기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패를 들게 한 후 다시 경호실로 가져가게 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경호하는 자에게 놋 방패를 들게 해서라도 왕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겸비가 아니라 교만이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호보암이라는 인간에게 초점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버리고 여호와께 범죄한 르호보암의 나라에 시삭을 보내 예루살렘을 치게 하고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게 합니다. 이 일로 유다의 방백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선지자 스마야를 보내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라는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스마야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고백한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자신의 선함과 믿음을 바탕으로 겸비함을 드러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며, 반복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12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금 방패를 빼앗긴 후, 그것을 대신해 놋 방패를 만들어 체면을 유지하려고 했고, 이는 그가 외형적 치장을 더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르호보암의 겸비가 르호보암의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영적 실패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르호보암의 겸비는 그의 실패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인간은 실패하는 존재지만, 낙심하지 않고 노력하면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비함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노력과 태도에 초점을 두는 비성경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실패를 묵인하거나 무시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실패한 존재임을 전제로 하여 그 실패한 자 속에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담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선악과를 두시고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 아래서 인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인간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를 드러내시려는 계획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실패 자체를 목적 삼지 않으시지만, 그 실패를 통해 자신의 은혜와 진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존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실패하는 자인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주님은 의로우시다’라는 참된 고백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패 속에서 주로 인해 피어나는 겸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