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4:9-15>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40915.mp4
<본문>
9..구스 사람 세라가 그들을 치려 하여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대를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10.아사가 마주 나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전열을 갖추고
11.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12.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들이 도망하는지라
13.아사와 그와 함께 한 백성이 구스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의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매우 많았더라
14.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에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15.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낙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설교 요약>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려 할 때, 아사의 군대는 유다에서 큰 방패를 든 자 삼십만 명과 베냐민에서 작은 방패와 활을 다루는 자 이십팔만 명, 도합 오십팔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아사 군대는 자력으로는 구스 군대를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아사가 선택한 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이것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인정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불신앙으로 규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사의 기도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믿음의 행보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더욱이 아사가 간절히 기도한 후,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군대 앞에서 치시니 그들이 패하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사의 군대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게 되었고 결국 구스는 완전히 패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아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해석되면서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사의 기도에 응답하신 이유를 아사가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제거하며 선과 정의를 실천한 데에서 찾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사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처럼 기도 응답의 이유와 조건을 인간의 행위에서 찾는 것은, 신을 찾는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종교적 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기도 응답을 받는 비결’이라는 이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오직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대표적인 오류일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사가 우상을 제거한 공로를 선하게 보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해석이 옳다면, 차라리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 자체를 애초에 막아주시는 것이 인간에게 더 합당한 하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본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 중심, 곧 자기 유익이라는 자기 관점에만 매여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사의 기도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사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유다의 백성 전체 문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사의 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 기도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사의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아사가 제거한 우상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우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솔로몬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시작됩니다. 솔로몬이 아내들이 섬기던 이방 신들을 받아들였고, 그 영향은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사의 시대에 이르러 우상을 제거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 왕들인 르호보암과 아비야가 우상숭배를 묵인하거나 방치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던 유다 백성들조차도 우상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일상과 종교 생활 속에 우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평안, 번영, 다산 등을 이루기 위해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종류와 이름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유다 백성이 이러한 우상들을 받아들이고 섬겼다는 것은 그들 역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욕망을 그대로 좇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정신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신앙 태도로 하나님을 찾았던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십 년 동안 평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의 평안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식했을까요? 오히려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 덕분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유로 아사가 우상을 제거한 후에 유다에게 평안을 주신 것은, 단순히 우상 철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평안이 우상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참된 평안의 근원이 우상이 아니라 자신 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상과 함께하는 유다가 아무리 매일 아침 번제를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단지 율법에 따라 행하는 형식적인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며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 종교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 백성에게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진정으로 주를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려고 아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구스 군대를 보내신 것입니다.
아사는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약함에서 벗어나 강자가 되기 위해 힘을 추구하고, 그 힘을 제공할 존재로서 우상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한 자 편도, 약한 자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사이에 계시며 세상이 추구하는 힘과는 무관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더 강해지고 번성하고 부흥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현대의 교회는 실상 유다가 섬겼던 다양한 우상들을 이름만 바꾸어 반복해서 섬기고 있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불편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세상 속에서 힘 있는 존재, 곧 강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힘을 추구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힘의 크기에 따라 서열이 생기고, 그 서열은 곧 차별과 지배의 구조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별적 힘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우리’의 관계로 이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유다에게도 오십팔만 명이라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만약 구스의 군대가 이십만 명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다’라는 기도는 필요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이긴다고 판단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라고 찬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그 믿음과 찬송의 중심에는 자기들의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는 전쟁에서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리는 것은 보이는 힘이 아니라 언약으로 일하시는 주의 이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를 이길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전쟁의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