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6:1-6>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60106.mp4
<본문>
1.아사 왕 제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2.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5.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6.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설교 요약>
설교가 성경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이거나 도덕주의적, 또는 성공 주의적인 왜곡된 내용으로 나아가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성경을 하나의 통일된 언약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택한 백성을 일관된 뜻 안에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알지 못한 무지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성경의 본질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의 해석이 복음이란 가면을 쓰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인 척 행세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설교는 언약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 욕구, 노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의 믿음을 강조하는 잘못된 설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언약의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언약은 무시되고 인간의 뜻에 맞춘 설교로 가득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선언한 사도 바울의 엄중한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약을 상실한 설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 안에서 말씀을 해석하지 않을 때, 설교자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바른 행위가 곧 바른 믿음의 증거이며, 행위가 바르지 않다면 믿음 역시 바르지 않다는 식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 행동을 점검하면서, 때로는 믿음 없음을 자책하거나 반대로 자기 행위에 만족하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접근할 경우, 인간의 본성과 생각에 맞지 않은 성경 이야기로 인해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아사 왕 시대의 전쟁 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예루살렘과 국경을 접한 라마 지역을 군사적 요충지로 삼아 요새를 건축하기 위해 유다를 치는 것입니다. 이유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왕래하며 성전에서 제사하는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백성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음으로써, 북이스라엘 내부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불안과 권위 약화를 사전에 차단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사에게 이번 전쟁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아사와의 전쟁에 앞서, 역대하 14장에서는 구스 사람 세라가 아사의 군대보다 두 배가 넘는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아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합니다(14:11). 그리고 하나님이 아사와 유다 앞에서 구스 군이 추격하게 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을 정도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전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승리를 경험한 아사 왕입니다. 그런 그가 다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전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에게서 나와야 할 믿음의 행동이라는 것에 누구도 이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가 보인 행동은 이러한 기대에서 완전히 어긋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어 그의 군사력을 빌려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물러나게 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미 경험한 아사 왕이 우리의 상식적 기대와 전혀 맞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당혹감과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믿는 사람에게 발등 찍힌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사의 행동을 믿음의 사람도 넘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이기에 구원받은 자라 해도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구원을 이루었다고 방심하지 말고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공감과 수긍을 이끌어 내는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아사가 말년에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한 상황에 처했을 때조차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오직 의원들만을 찾았다는 점입니다(대하 16:12). 이는 분명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이후 그가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이 회복되었다는 언급이 없이, 이 년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과연 구원받았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여러분은 아사의 구원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마 1:7)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사의 이름이 예수님의 계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에 따라 성취된 것임을 일관되게 증거하는 성경 내용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언약적 관점을 떠나 인간 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아사와 같은 종잡을 수 없는 믿음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예들이 적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류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듣게 된 것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본성에 부합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결론은 언약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루시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언약 신앙은 인간은 빠지고 하나님이 개입하여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 신앙에서 아사를 평가하자면 아사의 믿음은 없습니다. 구스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은 것도 아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십자가에서 주의 피로 이루신 용서를 감사한다면 그 또한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하신 덕분입니다. 이처럼 언약으로 인해 구원되고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그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