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8:1-3>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80103.mp4
<본문>
1.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2.이 년 후에 그가 사마리아의 아합에게 내려갔더니 아합이 그와 시종을 위하여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였더라
3.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냐 하니 여호사밧이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하는지라
<설교 요약>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세상의 도덕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 해석의 내용이 세상의 관점과 일치하거나 이해가 가능한 차원에 머무른다면, 그것을 성령의 감동과 은혜에 의한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라는 차원을 넘어서 ‘내가 알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듣고 배워서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에 또 다른 정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나를 하나님의 세계로 이끄는 말씀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뜻합니다.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성경이 인간의 지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지식적으로 고차원적이고 수준 높은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도덕으로는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기도 하고,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인간사의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옛 역사적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비록 실천적 의미에서는 이해가 된다고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 곧 언약의 세계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언적 기능으로 역사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기능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며 그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본문의 이야기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를 교회의 상식에 따라 여호사밧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한다면 그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17장에서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으며(5절), 점점 강대하여졌다(12절)는 사실이 언급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또다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여호사밧처럼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게 하신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임을 안다면 여호사밧의 부귀와 영광에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여호사밧이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인척 관계는 그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킨 일을 말합니다. 이 결혼으로 여호사밧과 아합은 동맹관계가 되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17:4절에서 여호사밧을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칩니다.
이러한 그가 아합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모순된 행위가 되며, 따라서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고 말할 이유도 사실 사라진 셈이 됩니다. 복에 이어 등장하는 내용은 우리가 본받을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내면에 구축된 이론이고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합과 연합한 여호사밧을 두고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고 반복하며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에게 주어진 부귀와 영광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게 떨쳤다고 한 것을 보면 어쨌든 아합보다는 부요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 전에 먼저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부귀와 영광이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한순간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소유에 적응하고 일상화되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으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맬 것이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와 비교하며 상대적 결핍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은 일시적인 충족으로 완결되지 않고, 또 다른 욕망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것이 곧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사밧이 아합과 연합한 것은 어쩌면 그가 어떤 결핍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왕으로서 이미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고 있었던 현실에서 느낀 결핍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아합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이 아니었을까요? 열 지파를 가진 이스라엘과 겨우 두 지파에 불과한 유다는 땅의 넓이나 백성의 수에서 분명 열세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차이는 여호사밧이 누리던 부귀와 영광으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는 아합에게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라고 답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하나로 말함으로써 자기 결핍을 충족하고자 하는 여호사밧의 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사밧과 같은 부귀와 영광을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 해석하며 여기에 소원을 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부귀와 영광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이끌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된 은혜의 가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호사밧의 아합과의 연합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것은, 어떤 수준의 부귀와 영광이 주어진다 해도 인간의 마음은 만족과 감사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핍을 채워줄 새로운 것과 연합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는 우리의 실상이고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삶의 끝에 서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귀와 영광은 분명 인생의 답이 아닙니다. 답은 매일 같이 우리가 예상하지 않는 삶으로 이끄시며 주의 의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