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8:28-34>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82834.mp4
<본문>
28.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29.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둘이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30.아람 왕이 그의 병거 지휘관들에게 이미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 한지라
31.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32.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갔더라
33.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의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나를 진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4.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겨우 지탱하며 저녁 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
<설교 요약>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의 안정과 번영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물질적 번성이나 사회적 성공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인도하신 증거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것의 보존과 확장을 위한 상상의 존재, 즉 우상으로 믿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처럼 일하지 않으시며, 또한 인간이 원하고 기대하는 방식으로 삶에 개입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에서 인식하는 하나님은 창조주가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고 또한 믿는다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결국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을 주며 때로는 위로해주는,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하나님일 뿐입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에 드러내어 알리신 것은 단순히 그분이 창조주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창조 세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신성은 인간의 불의함을 드러내며, 그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라면, 인간 또한 그 만물 안에 포함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음을 생각하면 인간에게 자기 것은 허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영화를 위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을 자기 소유의 보존과 번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신앙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 대상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하나님은 진노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 진노 앞에서 인간은 자기를 변명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는 심판의 존재로만 서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본문에서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을 죽이기로 하셨다는 말씀을 미가야에게 전해 들었음에도 참된 말은 옥에 가두고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거짓 예언의 말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자기 욕구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참된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자신은 변장을 하고 전쟁터로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왕은 언제나 적군의 주요 표적이 됩니다. 왕을 죽이는 것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합이 변장을 하겠다는 것은 곧 적군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죽음을 피하려는 자기 보호의 행동입니다.
아합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승리한다는 사백 명 선지자의 말을 듣고 올라가지만, 혹시라도 미가야의 예언이 참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그 말씀을 피하기 위한 인간적 대비책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준비하고 대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방법을 무력화하시고 이기심으로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대비나 행위가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죄를 직면하고 추적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이며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역할이며 그 말씀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죄가 쉬지 않고 작용하는 인간의 불의와 더러움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 만물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로만 생각하고, 세상 속에서의 자기 번성을 꿈꾸며 찾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은 탓에 아람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으로 알고 싸우려고 합니다. 그때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고 여호와께서 아람 지휘관들을 감동시켜 여호사밧을 떠나게 하십니다.
반면에 아합은 변장이라는 방법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했지만 수많은 적군 병사 중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쏜 화살이 갑옷 솔기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진중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전쟁이 맹렬하여 나가지를 못하고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죽음을 피한 것도, 아합이 죽은 것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아합의 죽음, 즉 아합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합의 죽음을 필연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아합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우리를 죄 아래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필연, 즉 언약의 성취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개인적인 일상의 삶을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연결하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구원과 연관이 없는 우연한 사건입니다. 다만 우연한 사건에서 언제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나의 실제를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그리고 주의 의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자랑하는 성도로 세우시는 것이 필연적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