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19:4-7>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190407.mp4
<본문>
4.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5.또 유다 온 나라의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읍마다 있게 하고
6.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7.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설교 요약>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 아합과의 부적절한 동맹 속에서 전쟁에 나아갔지만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기 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호사밧 개인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확인할 수 있는 체험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사밧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신앙 체험으로 간직할 것입니다.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지나간 기적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삼을 것이고 그러한 체험이 있는 자기 믿음을 자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간증이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간증 집회를 즐겨 찾는 이유는 타인의 신앙 체험 속에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흔적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간증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임재하심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간증 이야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위로, 그리고 내면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면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라는 성경의 표현도 단순히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넘어 죽음의 경계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체험한 자의 내적 평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체험에서 비롯된 평안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구하는 이른바 ‘신앙 체험’은 대부분 자기 신앙을 확인하고 긍정하려는 심리적 욕구에 머무른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신을 향한 인간의 신앙 열심을 끌어내고 강화할 수는 있으나, 십자가의 복음, 곧 인간의 공로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는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수단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간증을 들을 때는 그 체험 이야기가 단지 개인의 신앙을 드러내고 있는지, 아니면 체험에 관심을 두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증거하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소위 간증 집회는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해 일하신다’라는 안일한 위안과 평안을 제시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나도 저런 믿음이 되어야겠다’라는 헛된 결심에 머물면서도 그것이 십자가를 배격하는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을 드린다면 성도의 신앙 체험은 십자가에서의 체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갈 2:20). 즉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도, 행함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부인하게 되는 것이 성도에게만 있는 십자가 체험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가 전부이고, 이 공로를 믿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체험의 간증은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십자가 체험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면 결국 죄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죄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스스로 죄를 인식하고 그 죄로 인한 저주와 죽음을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받아들일 안목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성은 자기 의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원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죄를 드러내고 자신이 죽은 자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평안히 돌아온 여호사밧을 기다린 것은 예후의 책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책망을 들은 후에 한 일은, 유다 온 땅을 다니면서 백성들이 그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성읍마다 재판관을 세워서 사람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공의의 재판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였다”라는 것은,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를 떠나 있었다면 유다 백성이나 지금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신앙생활은 정작 믿음과는 무관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회개의 행위입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겠다는 자기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진노 아래 있는 심판받을 자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욕구와 같은 욕구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전쟁터에서 평안히 돌아온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였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옳고 정당한 자를 도우신다는 것이 인간의 선악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성이 예후의 책망으로 깨어진 것이고, 성전 제사와 종교적 형식으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고 여겼던 유다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온 땅을 다니면서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정당해질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게 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각 성읍에 재판관을 세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재판관을 세우고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라고 당부합니다. 일반적으로 재판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법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억울한 자의 사정을 풀어주고, 불의를 행한 자를 징벌함으로써 정의를 세운다는 점에서 분명 인간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위해 재판할 것인가를 잘 살피라는 것으로 재판의 다른 의미를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재판관의 기준이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판관을 세운 이유가 유다 땅의 질서가 아니라 율법이 세우는 질서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재판관은 인간의 외모, 행함을 보지 않고, 뇌물을 받고 뇌물을 준 인간의 뜻대로 인간을 위해 판결하지 않고 율법의 기준을 따라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판결하는 것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하나님을 위한 재판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견자 예후의 책망 덕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책망은 진노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 은혜의 방식입니다. 책망이 있고, 책망으로 인해서 날마다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성도의 체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