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0:14-19>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01419.mp4
<본문>
14.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그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17.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19.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설교 요약>
여호사밧이 이방 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행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현재의 위기를 신앙적으로 해결하려는 지혜로운 현실 대처로 평가받을만합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말씀하시고 전쟁에 개입하셔서 두려움의 상황을 해결해 주신 것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대하고 원하는 결과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여호사밧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의 기도가 성취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자의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라는 권면으로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아무리 기도해도 여호사밧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응답이 가시적으로 성취되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염두에 두고 하는 기도는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에 매달린다면 ‘어리석다’라는 조롱을 받는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단지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응답해주신다’라는 궁색한 변명 아닌 변명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여호사밧과 같은 응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해도 정작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거의 전부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되는 현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는 기도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소위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응답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도 자체를 신앙의 본질적 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를 자신이 믿음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신앙적 행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자기 증명의 행위 가운데 하나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사밧의 처지에 있었다면 국가적 위기 앞에서 곧바로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구원을 구하는 기도부터 드렸을까요? 여호사밧이 왕이 된 초기에 한 일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고(대하 17:1),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의 손에서 나라가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유다의 군사력이 전혀 미약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적군이 엔게디까지 올라온 상황에서 왕으로서의 우선적인 조치는 전쟁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부족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자기 할 바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모든 현실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기도 후에 여호와의 영이 임한 레위 사람 야하시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날 그들에게로 내려가 만나게 될 것이나 너희가 싸울 것은 없고 다만 대열을 이루고 서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고, 레위사람들은 마치 이미 승리한 자들처럼 큰 소리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쟁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언하셨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여호사밧이,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현실 문제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사건을 나에게 속한 나의 일로 규정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사건을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일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여호사밧이 전쟁을 앞두고 아무 행동도 없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마치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결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전쟁을 자신에게 속한 자기의 문제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잘못된 오해임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도 같은 오해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말씀한 대로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거의 전부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인식하는 가운데서 기도는 일찍이 하나의 종교 형식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드러내고 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없는 삶이 자리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속한 전쟁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현실이 평안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거짓된 평안 가운데서 하나님이 싸우시고 승리하신 하나님께 속한 전쟁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것이 현재 기독교인의 신앙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나름의 ‘전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더 확장하기 위해 타인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전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도우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가 나의 능력과 수고에 가치를 두는 것을 거부하시며, 우리를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싸울 것이 없는 자로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구원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승리를 찬송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찬송에 참여하는 신자는 자신의 죄 된 현실과 무능을 깊이 자각하며, 오직 주위 피에 의지하여 “주께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야말로 야하시엘과 같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여하시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동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의 전쟁 상대는 이방 나라 연합군이 아니라 자기 전쟁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신입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신 전쟁이며 이방 나라를 엔게디로 보낸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결국 그 목적은 나의 전쟁, 나의 승리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시며 승리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성도는 이미 이긴 자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