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4:8-14>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40814.mp4
<본문>
8.이에 왕이 말하여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고
9.유다와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 하였더니
10.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지니라
11.레위 사람들이 언제든지 궤를 메고 왕의 관리에게 가지고 가서 돈이 많은 것을 보이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관원이 와서 그 궤를 쏟고 다시 그 곳에 가져다 두었더라 때때로 이렇게 하여 돈을 많이 거두매
12.왕과 여호야다가 그 돈을 여호와의 전 감독자에게 주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보수하며 또 철공과 놋쇠공을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더니
13.기술자들이 맡아서 수리하는 공사가 점점 진척되므로 하나님의 전을 이전 모양대로 견고하게 하니라
14.공사를 마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 앞으로 가져왔으므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 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은 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
<설교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말할 때에는 먼저 예수께서 왜 인간 역사 속에 오셔야 했는지 의 이유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인간이 예수를 믿고 붙들어 자기 구원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받아들이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그 예수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얻고 삶의 평안과 안정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인간의 구원 문제에 국한 시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에서 중심에 자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구원과 유익을 중점에 둔다는 점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언약의 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더는 자기의 행위와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은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의 순종과 행함이지 우리의 순종도 행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선한 행위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힘을 쓴다면, 그 의도 자체가 예수님이 아닌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것이기에 악을 규정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내용을 자기에게 적용하여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니 성전을 더럽히는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로 성전을 깨끗하게 지켜서 성전다운 성도 됨을 나타내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바알 신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요아스가 성전을 수리하는 본문과 같은 내용을 성도가 성전 된 자신의 행위를 고쳐서 성전다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아스에 의해 수리된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론해야 할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전을 이전 모양대로 견고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만 보면 솔로몬이 처음 건축했던 성전의 원래 모습대로 건물을 복원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말하는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파괴했다는 말은 성전의 외형 자체를 훼손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건축물의 손상과 이전의 모양대로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성전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의 신앙 현실과는 그 어떤 관련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한 건물 수리가 아니라 성전이 성전 되는 원리에서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이전 모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하 6:10-11절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후 그것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것임을 밝히고, 그 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성전의 본래 의미, 즉 ‘이전 모양’은 인간의 이름이나 목적을 위해 신을 찾는 공간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거룩한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을 인간의 이름과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성전의 본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전의 본래 모양을 파괴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달랴의 아들들이 성전을 훼손하고 그 성물들을 바알을 섬기는 데 사용한 행위는 단순한 건물의 손상이 아니라 성전의 본질적 의미를 무너뜨린 악행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알 신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번영과 욕망, 곧 인간의 이름과 이익을 중심에 두고 신을 섬기는 종교적 구조를 지녔고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성전은 인간의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고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는 것은 죄가 용서되고 의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죄 용서와 의롭다 하심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드러나는 언약 방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것은 죄인으로 드러내는 부르심이며, 동시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 속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성전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 즉 성전세를 궤에 던졌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던져서 버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전 수리를 위해 돈을 궤에 넣는 것을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신앙 행위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전의 이전 모양으로의 수리를 위해 돈을 바치는 성전세의 의미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새롭게 지음 받은 성전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견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성전으로서의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