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4:17-22>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41722.mp4
<본문>
17.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20.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22.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설교 요약>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기 구원입니다. 이에 따라 무엇이 구원에 방해가 되는 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대부분은 그 원인을 외부적인 조건에서 찾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겪는 다양한 사건과 환경이 신앙을 흔들고 유혹함으로써 구원을 방해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해의 배후에 사탄의 역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사탄의 유혹에 지지 않는 신앙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지켜주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어떠한 외적 상황에도 동요되지 않고 신앙적 경건을 유지하는 것을 곧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요소는 외부가 아니라, 악한 본성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원수가 죄의 존재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나오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의 오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야다가 제사장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가운데 장사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행한 선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자손인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야다의 선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 백성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구원임을 여호야다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대하 23:16)라는 선언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야다의 선한 행함입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의 상황이 급격히 변하게 됩니다.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을 헐며 그의 제단과 형상들을 깨뜨리고, 제사장 맛단까지 죽이며 우상을 제거했던 유다가, 돌이켜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할 때 우리는 유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완전히 배반하여 떠난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우상을 유일한 신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유지하는 가운데, 동시에 우상도 함께 섬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당 한 편에 불상을 두고 거기에도 절하면서 경배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긴 유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면, 그다음은 그들을 심판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여호와께로 돌이키시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이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에 이르게 하시며, 우상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시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판이 당연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요아스가 이 은혜를 알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였다면 선지자가 책망하는 말을 듣고 우상을 섬긴 온 유다 백성에게 회개를 명령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책망은,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는 것이었고, 또한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책망을 들은 무리들은 회개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아스의 명령을 따라 여호야다의 아들이자 선지자인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이는 악행을 행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행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은혜를 잊은 자에게서 드러나는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아스가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애초에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의미로 본문을 해석한다면, 이 사건은 결국 ‘은혜를 잊지 말라’는 하나의 교훈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이 자신의 믿음과 의지로 은혜를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는 자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러한 가능성을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은혜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는 그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를 교훈한 것이었고, 그 교훈 아래에서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던 것입니다. 교훈에 의한 요아스의 정직함은 심판이 마땅한 유다를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오게 하셔서 함께 하시는 긍휼과 자비하심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과 자비를 성전 제사, 즉 제물의 피로 유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요아스가 아달랴의 아들들에 의해서 파괴된 성전을 백성들에게 성전세를 거두어 수리하여 이전 모양의 성전으로 견고하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야다가 전한 교훈 아래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아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고 그 교훈이 사라지자 유다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만족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처럼 풍요롭고 화려한 나라를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방백들이 왕에게 나아와 절하며 한 말도 나라의 번영과 강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아세라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긴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아스처럼 은혜를 잊고 말씀이 주는 책망도 무시한 채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성도의 신분을 얻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은혜 잊은 자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