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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대하 26:1-5

대하 26:1-5>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6010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2.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3.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4.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설교 요약>

교회는 하나님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주일 예배의 대표 기도에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무한자비하시고 절대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신앙 고백적 언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종교에서 자기의 신에 대해 말하고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은 유한하지 않으며, 못 할 일이 없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가령 불교의 부처나 이슬람교의 알라신도 전지전능한 절대자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에만 국한된 언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분명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분으로 증거합니다(삼상 2:67).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죽음, 형통과 환난, 높아짐과 낮아짐을 주관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종교 역시 자신들이 믿는 신적 존재, 즉 우상을 자기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자로 이해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 세상에서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존재로 믿는 수준을 넘어서, 다른 종교의 우상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는지가 분명하게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도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복과 화를 말씀의 실천 정도에 따라 조절하여 행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한다면, 교회가 아무리 고상한 언어를 사용해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을 우상과 같은 수준에서 믿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기능하는 종교의 우상과 같은 신으로 말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을 제공하는, 다시 말해서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실용적 존재로 인간에게 함께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하나님 역시 인간의 성공과 안정을 보장해 주는 실용적인 신으로 이해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라는 말씀도 인간의 욕망과 필요를 중심으로 해석되면서 에돔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 신으로 세우고 경배한 아마샤의 행실이 거의 2800년 후의 우리에게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조건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마샤 이후에 왕이 된 웃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또한 성경이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말하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곧 형통을 얻는 필수조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형통을 말할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을 조건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러한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 삶과 인생이 막힘없이 잘 되고 원한 일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상상하고 기대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형통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서 하나님을 우상과 같은 실용적인 신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현실에 처한 악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인간에게 하나님을 스스로 찾고 구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을 찾는 것을 형통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의한 본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지한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이며,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조차 없음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도 그의 능력이나 종교적 열심의 결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는데도,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다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본문은 단순히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나 도덕적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어떤 신앙의 흐름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아마샤의 모든 행위를 정직하였다라고 말하기에는 분명히 의문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우상을 가져와 경배했고, 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의 모든 행위를 아무 구분 없이 정직함의 범주 안에 넣어 버린다면, 결국 모든 행위가 정직한 왕을 하나님께서 멸하신다는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라는 말은 아마샤의 행위 전부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정직함으로 선언하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웃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개인이 결단한 결과가 아닙니다. 5절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묵시가 웃시야에게 관여한 결과로서의 정직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묵시가 웃시야로 하여금 정직하게 행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보면, 웃시야가 행한 정직함이 아니라 묵시로 인한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샤의 모든 행위가 정직했다는 것도 아마샤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관여한 관계에서의 모든 행위로 이해할 문제입니다.

 

 

5절의 그가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라는 말도 역시 하나님의 묵시가 웃시야에게 관여할 동안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인간을 배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시는 것 또한 인간의 신앙이나 열심의 대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웃시야의 형통은 그가 하나님의 묵시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형통이라는 점에서 우상이 주는 형통과 다릅니다. 우상이 주는 형통은 환상이지만 하나님의 묵시, 말씀이 관여하는 성도의 형통은 현실입니다.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아들의 피로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참된 형통의 현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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