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7 15:01

(103강) 기이한 도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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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대하 26:6-15

대하 26:6-15>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6061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7.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8.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9.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10.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11.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12.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13.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14.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설교 요약>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판단하며,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단지 악한 행동을 할 때만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떠나서 모든 행함이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이 이미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간은 부정한 자이고 마음이 부패한 상태이기에 선을 행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일 뿐이라는 성경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선을 추구하며 자신의 선함으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죄인이라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선한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인간 중심의 욕망과 교만을 간파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하시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한순간도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깊이 알면 드러나는 것은 선함이 아니라 죄가 전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누리는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능력이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개인적이고 세상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웃시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과 여러 이방 나라를 치고, 암몬 사람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강성해져서 그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던 것처럼,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강해지고 높아지며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구하는 도우심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 안정과 번영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을 강성하게 만드는 분으로 이해하며,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주시는 신으로 알고 자기를 위한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세상에서 강성해지고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면, 이 세상은 마땅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성도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힘 있는 자에 의해 다스림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강성해진 성도 즉 힘을 가진 성도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한 세상 가운데 높임 받는 이름 역시 성도의 이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를 도우시는 분이시고,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54:5, 121:1-8, 41:10, 1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웃시야처럼 세상 속에서 강성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단지 개인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큰 성공과 번영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에서의 강성과 성공, 번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고 팔십이라고 해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합니다(90:10). 또한 인간이 해 아래에서 이루고 붙들고자 하는 모든 수고가 결국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2:11). 따라서 성공과 번영으로 자신을 자랑하려는 것은 결국 사라질 것을 붙드는 헛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세상일의 형통과 번성을 위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관심과 목적이 여전히 해 아래의 것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신앙생활은 그저 해 아래에서 무익한 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도우셔서 강성하게 하신 참된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웃시야의 믿음과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웃시야의 강성함은 인간의 능력과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웃시야가 단 하루도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온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의 왕권과 승리, 번영과 명성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웃시야의 강성은 결국 그에게서 교만을 유발하였고, 그 교만은 악을 행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웃시야를 강하게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추어져 있는 교만과 악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악을 보지 못한 웃시야로 하여금 악한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강성하게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도우심인 것입니다. 인간을 높이고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숨겨진 죄와 교만을 드러내고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도우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우심은 세상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 또한 알지 못하고, 그래서 구하지도 않는 참으로 낯설고도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을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는 것으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와 우리를 만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심으로써 나를 심판받아야 할 악한 인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진노의 자녀인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시고, 심판이 마땅한 우리의 본래 자리로 부르셔서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하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아니면 주를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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