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막 16:9-14 개정)
<설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사실로 증거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서 무덤에서 나왔다고 해도 자식이 살았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는 불신의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처럼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증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믿지 않음’이었습니다. 예수를 아예 죽은 자로 간주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상식에 갇혀서 예수님의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미 부활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었고, 예정된 그 사건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음을 뜻합니다. 난데없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다는 말씀이 제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제자라면 죽었다가 다시 사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애당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안다면 제자들의 믿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당연하게 여겨지다면 그 시각은 자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3년의 세월도 믿음에는 보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쳐버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지만, 결국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그들의 전부라면 우리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수십 년을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듣고 또 어떤 체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세상에 집착하면서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는 일에 몰두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은혜로 짓누르면서 인생의 헛됨을 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날 위해 살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고’ ‘그런 나를 하나님이 간섭하시며 영생을 소망하게 했을 뿐이고’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다닌 수십 년의 세월은 뭡니까? 그 세월들 때문에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를 다닐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의 3년 세월도 허송세월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에 대해 모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 할 것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부르셔서 3년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도망친 것도 부족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실패로 봐야합니까?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실패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괜한 수고를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은 실패와 믿음 없음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제자들의 믿음의 바탕에 인간적인 요소는 모두 삭제가 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뒤에 그들에게서 어떤 열매가 맺힌다고 해도 제자들은 그 열매를 자신들의 노력으로 맺은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다만 ‘무익한 종’이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3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자신에게서 보이는 것은 세상을 향한 집착뿐입니다. 자식에게 집착하고, 돈에 집착하고, 시간에 집착을 하는 욕망의 흔적만 잔뜩 발산하며 살아온 세월입니다. 신자는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에게서 바로 그러한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에 실패하는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자신에게서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내가 했다’거나 소위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즉 사단의 사고방식을 믿음이라고 고집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나오게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상봉을 했다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기쁨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히 기쁨입니다. 죽은 줄 알고 낙심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다시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와 다시 만난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에 대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기 전까지 믿음이 없고 완악한 자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든 그 모든 것이 제자들의 공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3년의 세월에서 배운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은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오면 나올수록,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다가올수록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믿음에 있어서는 감히 인간이 개입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제자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죽어 버린 스승에 불과할 뿐이고,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소망도 힘도 제자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의 열심과 정성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도우시는 분으로 오게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살아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허송세월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괜히 다닌 것이고, 괜히 돈 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닐수록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 뿐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된다는 말의 의미를 알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허송세월이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려주고 확인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이 꾸짖음이 오늘 우리를 향한 꾸짖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함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기에 바빠야 합니다. 내 믿음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의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를 영생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