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1.09.11 13:16

(1강) 예레미야를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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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1-10http://onlycross.net/videos/jer/jer-01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설교>

 

사람이 누군가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받게 되면 자연히 그 사람의 사상에 동화되는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지자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의 등장 역사는 짧지가 않습니다. 사무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말에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핍박하고 배척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받을 때까지 약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40년은 한 개인이 말씀을 전하는 기간으로서는 짧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40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뭐가 그 말에 동화되고 깨닫는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유다는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배척하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유다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내용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모친의 뱃속에 잉태되기 전부터 알았고 그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길을 가도록 잉태 전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레미야의 인생에 개인적인 계획과 뜻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선지자의 길을 가도록 작정되어진 예레미야에게 세상에서 무엇이 되겠노라는 개인적 포부와 뜻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개인적으로 어떤 뜻을 세우고 포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미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입장은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은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신실하게 실행되어진 결과입니다. 엡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정하시고 부르신 뜻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자로 부름 받은 것에는 창세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가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인생입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 성공 자기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인생과 신자는 서로 상관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시면서 이 같은 말씀을 하셨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예 맡겨만 주십시오’라며 자신 있게 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예레미야처럼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라고 말하며 사양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은혜의 영광을 높이는 신자로 살아가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누가 자기 속의 욕망이 원하는 인생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부르신 뜻과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곧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사양하려고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자신이 아이라 말할 줄을 모르다면서 선지자로의 부름을 사양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7,8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면 되었고 무엇을 명령하든지 말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다움입니다. 때문에 아이라서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은 선지자의 일에 지장을 초래하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아이라고 하면서 말할 줄을 모른다고 한 것은 선지자의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일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가면 되었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말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이야말로 무척 힘든 고난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과 결정의 기준은 자신의 이익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신자로써 해야 할 말인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 말을 하면 저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나에게 득이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가리게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길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보내시고 말하게 하신 것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소위 어른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이 있었고 연령적으로도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가 부름을 받을 당시는 약 20세 정도 되는 나이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자신을 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에 사양하는 예레미야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나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모로 선지자의 일을 감당할 수 없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니 예레미야가 어딜 가든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말라는 말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주시는 해답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이 말씀 한마디로 용기를 얻고 두려움이 없이 선지자의 길을 나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계속해서 두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19절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사로잡고 말씀이 강력한 신뢰의 힘으로 다가올 때 신자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고 계십니다. 홀로 보내시고 홀로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그 길에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신자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인도받는 신자를 해할 세력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신자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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