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잘못됨을 책망하십니다. 책망의 내용은 5절의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의 ‘너희 조상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헛된 것을 따라 행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미 조상 때부터 있어왔던 잘못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조상들과 동일한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조상들과 동일한 잘못된 길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신앙생활의 세월을 지내왔다고 해도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의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는 말씀을 보면 5절에서 언급된 조상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인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라고 하는 척박한 땅을 거치게 됩니다. 그 땅은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어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거주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땅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누가 인도하셨는가를 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숨 쉬며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라고 말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 자손도 여호와를 찾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면 제사장들부터 율법을 다루는 자들과 관리와 제사장들까지 여호와를 찾지 않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처럼 무익한 것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했으면서도 조상부터 대대로 자손까지 무익한 것을 좇았을까요?
그들이 헛되고 무익한 것을 따랐다는 것은 우상을 따른 것을 말합니다. 이점이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이 안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과 은혜를 경험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반역하며 무익하고 헛된 것을 따랐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항상 현실에만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도 그 경험은 결국 과거로 흘러가면서 잊혀지고 현재만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생의 전부를 보시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현재의 삶에 득이 되는 것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좇는 이유이며 하나님을 멀리 하고 무익하며 헛된 것을 좇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의 어떤 의나 선으로도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무익하고 헛된 것을 따랐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무익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실만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한 채 헛되고 무익한 것만 따르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관리들과 율법을 다루는 사람들과 선지자들 역시 현실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에 없으면 안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을 좇는 것입니다.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도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신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에도 의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믿음의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의의 세계입니다.
하늘의 의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의에 마음을 두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에 마음을 두게 되면 우리를 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무익하고 헛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신자는 인생 전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눈앞의 현재만을 보게 되면 인생의 전부는 사라지고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의의 존귀함보다는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현재만을 붙드시고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현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이것은 현재를 바라보는 사람과 인생 전부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을 분별하지 않고서는 진리의 길을 바르게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헛된 것인지 아닌지 분별도 하지 못한 채 현재의 이익만 좇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현재의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무익하고 헛된 것을 따르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이며 무지입니다.
우리가 유대 백성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역시 현재를 초월하여 살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그들과 같은 길을 갔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는 무익하고 헛된 것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보면 우리가 그들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참된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무익하고 헛된 것을 증거한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무익한 것과 헛된 것을 분별하지 못한 채 다만 사람들의 귀에 즐거움이 되는 것만 외치고 있습니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현재를 돕고 현재의 삶에 힘이 되는 신으로 변개하여 전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 헛된 것에 마음을 두고 행하는 것입니다.
현재만을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의의 하나님에게서는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세계를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로서 헛된 것이 아닌 참된 것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