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절)는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게 하셔서 자신들이 헛된 것을 좇았음을 보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싸움에 선지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싸움에 개입된 선지자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장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자신이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선지자라면 어떤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됨을 드러내어서 그들이 죄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선지자에게 나오지 않고서는 자기의 잘못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긴 채 계속 죄의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선지자로 알아보고 그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어떤 부를 이루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순순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 됨을 지적하는 말씀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지적받기 보다는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는 거부하고 배척을 했던 것이고, 반대로 평강만을 외치는 선지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덮어 버린 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로 환심을 사고자 했을 뿐이었고 성경은 이들을 거짓선지자로 일컫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상은 지금의 기독교의 실상과는 다르지 않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교회가 많이 세워져 있고 기독교인이 많고 목사가 많이 배출되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가 부흥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가 어떠함을 보게 되어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가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신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하는 말씀보다는 평강과 복을 말해주는 사람의 말을 듣기 원하고 즐겨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죄를 외쳤으나 듣지를 않고 오히려 선지자를 배척했던 당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앞에 나와서 말씀이 보게 하는 우리의 악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함으로써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폭포수 같은 은혜가 되어서 우리의 심령에 흘러넘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으로 진리의 길을 가는 신자의 온전한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누가 악이라고 인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야 하나님을 버렸다면 악이라고 하겠지만 세상은 단지 종교를 선택하고 신을 선택하는 것을 자유의 문제로 여기기 때문에 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을 악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세상이 웃을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웅덩이를 판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파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힘으로 웅덩이를 파지 않고 웅덩이를 얻고자 한다면 도적의 심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같은 자세를 악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자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선지자 앞에 나오지 않으면 악을 악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는 악을 행했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이 세운 규례대로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고 있었고 할례 등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인정하지 않는데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는 악을 행했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목마르지 않는 신앙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상의 것에 대해 끝없이 목말라 했습니다. 이방나라의 강함이 부러웠고 그들처럼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우상을 좇은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장자 재앙에서 죽음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잊었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불평만 불만만 가득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신실하신 하나님도 잊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하게 된 것은 그들의 힘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부터 그들의 힘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였습니다. 그
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인도했음을 증거하는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찬송하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세상의 헛된 것들만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면 세상의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우상을 좇은 것입니다. 이것이 11절에서 말한 대로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꾸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꾼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 믿고 의지한 채 죄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되는 의고,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살리는 하늘의 의를 주시는 분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의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소원을 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을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꾼 것으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힘의 배경으로 삼고 자신들도 힘 있는 자가 되는 길을 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힘에 목말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이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의는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힘으로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세상은 결국 죄의 삯인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신 은총으로 인해 예수님의 세계에서 의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세상의 무엇보다 의의 세계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에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자비하심입니다. 이 긍휼과 자비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