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1.12.04 16:10

(10강)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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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1-18http://onlycross.net/videos/jer/jer-0311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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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설교>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하고 내 마음에 맞춰주기를 더 원할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세상의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재난이나 재앙으로만 바라보면서 왜 그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 한숨을 쉬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역한 자로 말하고 유다는 반역한 자로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더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문맥만 보면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보다 더 의롭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배역이든 반역이든 그 의미가 같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배역한 이스라엘과 반역한 유다를 두고 누가 더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유다보다 더 의롭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든 유다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에게서 그 마음이 떠난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더 의롭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유다든 멸망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두고 의롭다는 표현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유다보다 더 의롭다고 하는 것은, 유다가 그만큼 악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봤으면서도 자신들이 가는 길을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에 유다는 이스라엘을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실까?’라는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들 역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멸망을 받는 쪽이나 멸망을 보는 쪽이나 멸망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길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8절의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므로 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도 가서 행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간음을 행한 이스라엘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도 행음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전혀 자리하지 않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악보다 더한 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는 것을 보면서 유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는 ‘우리는 힘을 길러서 이스라엘처럼 당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단순히 그들의 힘이 약한 결과로 보고 힘을 길러야 당하지 않는다는 교훈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힘이 없어 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길이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에게는 이러한 시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힘을 추구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길을 갔던 유다보다 이스라엘이 더 의롭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도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록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 맞지 않는 일들이 많지만, 우리의 생각과 기대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세상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주관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행하신 실패와 승리에 대한 이야기도 듣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성경은 성경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다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길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도 사실은 그들이 자기 영광과 힘을 구하는 길로 갔기 때문은 아닙니다.

 

 

12절을 보면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미 멸망한 북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 말을 선포하라는 것은 그들의 멸망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는 것에 또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배역을 깨닫고 긍휼이 있으시고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양육의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과 명철로 배역한 길을 가는 자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다른 것을 더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것이 곧 배역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항상 다른 것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악이 얼마나 큰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자연히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자기의 신앙 열정과 노력을 기억하고 과시하지 않게 됩니다(16절). 다만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거룩한 자로 일컬음 받게 하신 예수님의 일에 감사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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