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1.12.18 13:30

(12강) 마음 가죽을 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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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1-4http://onlycross.net/videos/jer/jer-04010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설교>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에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반응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인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즉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이면 꼬박꼬박 예배당을 찾아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기도 하고 성경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며 마음에 감동이 되기도 합니다. 어디를 봐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으로 인정될만한데 그런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여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우리가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수없이 듣는다고 해도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대하는 신자로써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여기는 것이 본문과 같은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이미 돌아와 있는, 그래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에는 해당되지 않는 자로 여기는 것은 섣부른 판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다도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을 떠난 자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로 돌아오라’는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유다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렸고 떠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상과 상관없이 살고 있습니까? 우상을 형상이 의미로만 이해하면 여러분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 신자일 것입니다. 부처상처럼 어떤 형상을 앞에 두고 경배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고 해도 과연 우상 섬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우상은 하나님 외에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누구도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우상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상을 눈에 보이는 형상이 문제로만 대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상 섬김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골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합니다. 엡 5:5절에서도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로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자신을 우상 섬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가 우상을 섬긴 이유는 이방인들이 소유한 것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처럼 힘을 가진 강대국이 되고 싶은 탐심의 마음이 이방인의 신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인으로 산다고 해도 탐심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정답이고, 따라서 우상을 섬긴 유다를 향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 또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인식 하고 인정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본문의 말씀에 이끌려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리하지 않으면 유다의 악행에 대해 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언급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 가죽을 베면 유다의 모든 악행에 대해 용서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가죽이란 마음이 가죽처럼 질기고 단단한 것으로 덮여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단단하고 질긴 것으로 덮여 있으니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전혀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유다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죽으로 덮여 있기에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들이 악행을 행하는 자라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 대한 회개가 없고, 회개가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유다의 악행에 대해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마음 가죽을 베고 마음 속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모든 사람은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드러난 자기 마음에 대해 떳떳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가죽을 베게 되면 자칭 의인은 사라지는 것이고 대신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며 이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절)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자기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절)는 고백을 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 앞에서 과연 ‘나는 다르다’고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도의 고백은 마음 가죽이 베어졌을 때 가능한 고백입니다. 자신이 부끄러움과 더러움과 악함을 생생히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실상을 생생히 보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은 온전히 예수님에게로만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 가죽을 베며 우리의 심령에 파고들 것입니다. 착한 행동으로 꽁꽁 싸매어 감추어 놓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파헤치면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속을 보게 되신다면 부끄러워하십시오. 감히 구원을 바랄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오시고 존귀한 피로써 모든 더러움을 덮어주시고 거룩하다고 하신 크고 높으신 은총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예수님이 함께 한 신자의 인생을 복되다고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 같은 앎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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