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1.01 13:48

(14강) 선지자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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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11-22http://onlycross.net/videos/jer/jer-0411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12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

13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의 병거는 회오리바람 같고 그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15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16 너희는 여러 나라에 전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리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17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설교>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살아가던 세상의 형편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던 사람은 계속 가난할 것이고, 어려운 문제가 있던 사람도 어려운 문제로 인해서 계속 고달프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고 없고가 전혀 다른 삶의 길로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써 이 같은 삶의 차이를 스스로에게서 느끼지를 못한다면 ‘과연 내가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것은 세상입니다. 세상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세상 것으로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예수님 안의 자신을 생각합니다. 돈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부름 받은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이 같은 믿음의 삶을 복음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며 옥중에서도 찬송하고 기뻐했던 사도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기쁨의 근원은 세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의 근원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본다면 예수님으로 인한 참된 기쁨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땀 흘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선지자는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마음을 아프고 답답하게 한 것은 선지자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는 이방 나라의 침략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12절의 말씀처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즉 선지자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그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사실로 아프고 답답한 것은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 받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마음의 악을 씻는 길로 나아갔어야 합니다.

 

 

마음의 악을 씻는 것은 유다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는 길은 오직 자신이 죄를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마음의 악을 씻고 구원 받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멸망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의 악을 씻는 길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던 세상에서의 부강함에 마음을 두고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던 것입니다.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들의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하고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이 답답했던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가는 길과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결국 심판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을 부르는 길을 가고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함도 보지 못하고 심판이라는 자신들의 결국도 알지를 못하는 그들이 심판을 아는 선지자가 보기에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선지자는 아는 것을 유다는 왜 몰랐을까요? 그 차이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었고 유다는 말씀 밖에 있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선지자는 말씀 안에서 유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말씀 밖에 있었고 그들은 세상만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신은 보지 못하고 이방나라처럼 부강하지 못한 자신만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라보는 이방 나라는 그들이 강하든 강하지 않든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존재이고 멸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며, 설사 그들이 연약하다고 해도 그들은 언약으로 인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언약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부강하여 세상을 힘 있는 자로 살아가는 이방 나라가 부러웠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화친을 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 길을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신자의 눈에 세상은 죄로 가득한 곳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 아래 있는 세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 또한 악을 행하는 자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는 길은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악을 씻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그 심령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22절에 보면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면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며 지각이 없는 미련한 것에 해당됩니다.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러한 자신을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지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호세아이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은 모두 거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는 믿음을 자신이 복 받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용서된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돈으로 사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지며 아픔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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