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29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증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증거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은 제거한 채 다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구약의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요 신약의 시대에는 거짓 사도들입니다.
이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증거되는 말에서도 차이를 드러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참된 선지자는 세상에 대해 심판을 선포할 때 거짓선지자는 ‘평안하다’는 말만 전했습니다. 이처럼 말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참된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세상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던 반면 거짓선지자에게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시각입니다. 세상을 혼돈과 공허와 하늘에 빛이 없는 어둠의 상태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세상을 눈에 보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눈에 보인 대로 세상을 말한 다면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은 창 1: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창조 전의 땅의 상태를 말합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처럼 창조 전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말씀이 없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 밖에서 말씀이 없이 사는 세상을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혼돈과 공허와 어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극명하게 나누어집니다. 결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라고 말한 것은 세상이 하나님이 말씀 밖에서 말씀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받은 민족이고 또한 율법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누구든 그들을 향해서 말씀이 없이 산다고 하면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눈에 유다는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상태로 말하면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은 그들이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다가 우상을 섬긴 것은 자신을 위해 신을 찾은 결과입니다. 세상을 향한 자신들의 기대를 이루어줄 신을 이방인의 신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유다가 말씀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아무리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며 제물을 바쳤다고 해도 선지자가 볼 때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속한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내게 힘이 되고 나를 영광스럽게 해 줄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상관없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내게 힘이 되고 나를 영광스럽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말하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세상입니다.
24-26절에서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라고 말하는 것도 선지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굳건하게 보이는 산도 진동하고 요동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의지할 대상이 아니며, 세상에 사람이 많은데도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가고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다는 것도 세상의 무너짐을 뜻합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바라보는 세상이라면 과연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혹시 돈 있고 건강하면 살만한 세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높은 자리에 오르고 노후대책까지 완벽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염려할 것이 없는 든든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어떤 인생을 산다고 해도 말씀 밖에 있다면 그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0절의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하여 자신을 멋있게 꾸미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잘된 자신을 보여줌으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의 잘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생의 만족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의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선지자라면 평안을 외칠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진 채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세상으로 바라보면서 평안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입에서 ‘평안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선지자 스스로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에서 외치고 있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 말 역시 말씀을 외면한 자들의 거짓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처럼 세상을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를 구출하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신자 역시 세상에서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의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을 마지막 때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마음이 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살 길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음을 분명히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세상은 돈이 있어야 살 맛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야 말로 가장 복된 길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