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2.05 14:11

(18강) 무섭고 놀라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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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5:20-31http://onlycross.net/videos/jer/jer-05203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0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23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26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29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설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고 단순한 자연적 현상도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 하나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기에 신자는 세상에 되어지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저 자연적 현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신자의 눈에는 놀랍고 기이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살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믿기에 교만하지 않으며, 주어진 것에서 감사하는 부요한 삶의 길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볼 수 없다고 아쉬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 동일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길로 가야 마땅한데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길로만 가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자연 만물에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고 파도가 그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래가 땅과 바다의 경계가 되어 바닷물이 모래를 넘어 땅을 침범하지 못하고 파도가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역시 땅을 침범하여 덮지 못하는 것들이 모래를 한계로 삼아 놓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바다와 파도가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다와 파도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를 넘지 않으며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은 넘지 말아야 경계를 넘어서 우상을 끌어들이고 이방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말씀을 넘어서게 되면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잃어버린 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은 이미 말씀이 무너져 경계가 사라졌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교회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렸다면 그 원인 역시 경계가 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경계로 삼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신자의 본분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말씀 밖의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이른 비는 파종할 때 내리는 비를 말하고 늦은 비는 결실기에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추수를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비를 내리게 하셔서 추수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단지 자연 현상으로만 여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추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누구도 때를 따라 비를 내리셔서 추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임을 증거할 수 있는 독특성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 등 모든 것이 이방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방인은 볼 수 없는 것을 이스라엘은 볼 수 있어야 하고, 이방인은 듣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은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같은 독특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21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니 그것이 곧 소경이며 귀머거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살려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독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땅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살게 하시는 은혜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어야 할 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아 있음은 말 그대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살아있음은 육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까지 확장됩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살아있음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땅의 것을 존재 기반으로 삼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땅의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으며, 땅의 것으로 서로 비교하면서 약자와 강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신의 은혜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존재 기반이 확장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도무지 살아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자가 살아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인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믿음의 길로 인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그같은 은총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며 세상에 끌려가는 것이야 말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신자 됨을 포기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붙들려 있습니다. 무엇 하나 독자적인 뜻과 힘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본인 또한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방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감사야 말로 신자에게서 증거되어야 할 독특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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