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설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은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인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이 통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 사람과 같은 어려움을 겪어 봤기 때문에 그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도와줄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가 당하는 일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유다와 같은 고통을 겪은 경험이 없고, 또한 유다의 고통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인데 우리는 유다와 동일한 죄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다의 죄는 19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 가운데 여호와가 계신데도 불구하고 이방의 우상을 끌어들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바벨론을 유다에게 보내어 그들을 치게 하시는 징벌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가 당할 일을 내다보면서 선지자가 깊은 탄식을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유다와 동일한 죄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가 이방의 헛된 것을 좇은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헛된 것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와 같은 징벌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가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때문에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나 그들이 겪게 된 모든 일들이 나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18절의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는 선지자의 탄식은 육신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즉 유다가 겪을 육신적 고통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정도로 큰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것에 대해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의 탄식과 우리의 탄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로 나오는 탄식은 육신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타인의 고통으로 인한 탄식보다는 나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어떤 마음이기에 유다의 문제로 인해서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크게 근심하고 마음이 병들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19절을 보면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며 유다와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도우시는데도 불구하고 이방의 헛된 신상을 섬김으로 여호와를 진노케 하는 것을 보며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헛된 것을 붙들고 좇고 있는 유다의 어리석음이 선지자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탄식이 나오게 한 것입니다.
탄식은 선지자가 아니라 유다 백성들에게서 나왔어야 했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저버린 채 그동안 헛된 것을 좇았음을 고백하며 자신들이야 말로 심판이 마땅한 죄인임을 회개하고 그와 같은 어리석음에 대해 탄식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탄식이 없는 것은 아직 바벨론에 의해 망하기 전이기 때문에 어쨌든 현재는 평안하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심판에 대해 외쳤지만 현실은 평안이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의 말에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게 되고 탄식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현실의 평안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다본 유다의 장래는 평안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유다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장래를 생생히 내다보고 있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방의 헛된 것을 좇는 죄의 길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유다의 어리석은 모습에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현실의 평안이 미래의 평안을 약속해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지가 세상의 운명이고 미래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세상의 미래를 보십니까? 평안입니까?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서 행복을 누리는 그런 미래를 보십니까?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미래, 즉 마지막은 심판이며 무너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결국 무너질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터가 되어 그 위에 세워진 것만 영원합니다.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쥐기 위해 애를 쓰는 모든 것들은 결국 무너질 것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헛되다고 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은 배설물같이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것을 손에 쥐겠다고 이방의 헛된 것을 받아 들여 섬기는 유다의 모습이 선지자의 눈에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어떨까요? 답답해하시며 선지자와 같은 탄식을 쏟아 놓으실까요 아니면 우리에 대해 안심하고 계실까요?
롬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탄식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탄식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탄식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유다와 똑같이 참된 현실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좇고 있는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자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성령의 탄식과 간구하심으로 인해서 의의 길로 이끌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탄식하게 하시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참된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향하게 하시며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세상이 헛된 것을 좇는 어리석음을 보게 될 것이고, 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탄식하면 주를 바라보고 나의 믿음을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탄식에 참여하는 것이고, 성령의 탄식과 간구로 인해 우리에게 이뤄지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길은 성령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만 바라보며 주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