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3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
7 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음이니이다
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
<설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을 형상화하여 섬기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막연한 대상보다는 보이는 확실한 것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나무인데도 수백 년씩 오래된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생각하게 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을 자신을 지켜주는 행운의 부적이라고 하면서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마치 행운이 떠나고 불행만 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처상이나 마리아상에서 기도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의 형상만 있을 뿐이지 인간이 깎아 만든 것일 뿐인데도 신적 의미를 부여하고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형상을 거부하시는 것일까요? 형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하고 하나님을 섬기듯 섬기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상을 만들게 되면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또한 형상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긍휼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의 악함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오로지 보이는 형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하시고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형상을 만들어서 비록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며 섬긴다고 해도 보이는 것을 신뢰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상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상징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풍성하심은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어떻게 형상화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부자 되고 권력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재물과 권력으로 사랑과 긍휼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이다’라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십자가로 확증되었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을 주신 것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랑과 긍휼을 무엇에 담아서 증거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부자 되고 성공한 그런 것에 사랑과 긍휼을 담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담아서 증거하기에는 너무 보잘 것 없이 작은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과 긍휼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우리의 거룩한 심령에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과 긍휼이 담긴 심령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세상의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징조는 하늘에 나타난 이상한 징조를 뜻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식이나 월식 같은 현상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과학적으로 알기 때문에 두려워 할 징조로 여기지 않지만 그 같은 현상의 이유를 알지 못한 고대사회에서 일식이나 월식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두려운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해와 달까지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자연을 주관하는 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신은 인간을 위한 존재였기 때문에 하늘의 이상한 징조는 신의 노여움으로 인식되었던 것이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안에서 신자는 어떤 징조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필요하시다면 넘어지게도 하시고 고통의 현장으로 집어넣으시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사람이 만든 어떤 형상도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복과 화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화는 세상 것을 기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하여 말해야 합니다. 즉 약속 안에 있는 것이 복이고 약속 밖에 있는 것이 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의 잘됨을 위해 신을 찾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이뤄짐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하는 것에 소망을 둘 뿐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다른 형상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참되시고 살아계시고 영원한 왕이십니다. 선하신 뜻을 가지고 그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일하시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믿는다면 신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어떤 일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평안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