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2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13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17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1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9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21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22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24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5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
<설교>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지으셨음을 믿는 것으로 충분치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보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12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권능과 지혜와 명철로 하신 일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단지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권능과 지혜와 명철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입니다.
13절의 말씀처럼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면서 비가 내리는 것 하나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명철에 의해 되어지는 일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해 되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는 이방인의 풍습을 따릅니다. 하늘에 이상한 현상을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을 잊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통속적이고 습관적으로 흘러갔고,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이방의 우상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말하고 믿고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하지만 인간을 위해 일하는 신으로 언급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한 신에게 잘 보여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쓰는 것이 신앙으로 포장되어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에서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라는 부분이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은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고 원하는 길로만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성은 내게 해롭고 불리한 것은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일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쪽으로만 하게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일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하지 말라고 항변하는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자신들에게서 떠나게 되는 것을 그동안 예수님을 따른 자신들의 노력이 모두 무너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지 말라고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을 사탄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이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믿음의 세계에 사람의 일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만이 있을 뿐이고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이야 말로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선지자는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는 말로 탄식 합니다.
선지자의 상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지 않은 유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 상처는 중상을 당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컸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긴다고 해서 상처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만을 외치면서 우상을 섬기는 유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자기를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지자의 상처는 예수님의 상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 상처가 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날 위한 사람의 일에 집중한 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인해서 예수님은 여전히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길을 작정하였고 가정하신 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나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뿐이지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노력이 있고 열심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뿐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조 신앙에는 인간의 의와 열심과 힘을 내세우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고 이루심을 고백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자신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합니다. 간증하는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도 바로 자기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이뤄주신 적이 없습니다. 원한 대로 되어진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허용이지 나의 뜻을 이뤄주신 것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길은 주께 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시면서도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붙들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 살게 하심으로써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외면하고 세상에 나의 길을 두고 그 길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 같은 나를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이 두신 길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알고 자기의 길을 내려놓으며 여호와가 인도하는 길에 소원을 두고 그 길로 인도 받기를 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