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6.10 16:26

(33강) 선지자의 질문

조회 수 429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렘 12:1-6http://onlycross.net/videos/jer/jer-1201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설교>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전제 아래 바라보게 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상선벌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고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을 행한 자를 징벌하시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는 것이 곧 세상의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선을 행한 자가 오히려 화를 당하고 악을 행한다는 잘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선지자처럼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선지자는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는 말로 하나님께 질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마치 검사처럼 유다의 죄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이어서 3절에서 죄인의 형량을 정하는 판사처럼 유다의 죄에 대해 어떻게 하실 것을 멋대로 정하여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같은 공의로운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이 악한 자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공의만 행하시면 세상에 모순은 사라지고 바른 질서가 이뤄지며 악은 사라지고 선이 다스리는 평화의 세상이 도래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악이 성행하고 선이 악에 의해 고통을 받는 모순적인 상황은 하나님께서 공의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에 대한 유다의 반역을 책망하고 재앙을 외치게 하십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 때문에 유다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심지어 선지자를 죽이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선지자는 반역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지 않고 외면하며 오히려 말씀을 전한 자신을 죽이려는 유다의 악에 대해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11:20절에 보면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악인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의 공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악인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악인의 길이 형통하고 반역한 자가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지 않은 모순적인 상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이 악인에 대해 보복을 행하신다면 세상은 달라질까요? 물론 악인에 대해 보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진다면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한 자가 복을 받는다면 세상에는 선을 행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세상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까지 인간의 악을 그냥 두실 필요가 없이 에덴동산에서 범죄 했을 때 보복하셨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선지자와 같은 불평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악에 대해 심판을 선포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형통은 형통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 사실 형통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끝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1:22,23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재앙을 내리실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같은 말씀에서 악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만을 바라봤습니다. 말씀에서 보게 되면 악인이 아무리 형통을 누리고 평안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해도 결코 형통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같은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영원함을 약속하셨습니까?

 

 

살후 2:12절에 보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믿지 않은 모든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된다고 해서 그것을 형통이라고 하며 불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형통은 끝에 서서 판단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붙들려서 생명으로 인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형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의 형통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선벌악이라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상선벌악이 인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상선벌악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면 그 어떤 인간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상선이 아니라 벌악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해 있습니다. 은혜의 방식으로 구원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체에서는 선을 생산할 수 없고, 생산되는 것은 항상 악에 지나지 않은데 그런 우리에게 은혜가 덮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은혜 됨을 바라본다면 세상의 형통은 형통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안은 평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만 참된 형통과 평안이 있는 세계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의 손이 자신을 붙들어 의의 생명으로 인도해주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악인에게는 보복하시고 의인에게는 평안을 주시는 것으로 일하시기를 원하고 그것을 공의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악인은 그냥 내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붙드시고 간섭하시면서 의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신자는 그냥 내어버려두시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에 있게 하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에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의 열매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자신의 믿음과 믿음으로 나타나는 열매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선지자가 어떻게 그런 질문과 불평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린 선지자를 통해서 온전한 인간은 없음을 알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68 예레미야 (21강) 내버린 은 신윤식 2012.03.04 4206
267 예레미야 (22강) 바른 길과 행위 신윤식 2012.03.11 4459
266 예레미야 (23강) 제사보다 사람 신윤식 2012.03.18 4223
265 예레미야 (24강) 죽임의 골짜기 신윤식 2012.03.25 4157
264 예레미야 (25강) 거짓의 붓 신윤식 2012.04.08 4058
263 예레미야 (26강) 탄식의 노래 신윤식 2012.04.15 4313
262 예레미야 (27강) 선지자의 울음 신윤식 2012.04.22 4522
261 예레미야 (28강)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신윤식 2012.04.29 4249
260 예레미야 (29강) 우상과 하나님 신윤식 2012.05.06 4276
259 예레미야 (30강) 선지자의 상처 신윤식 2012.05.13 4180
258 예레미야 (31강) 언약의 말 신윤식 2012.05.20 4181
257 예레미야 (32강) 기도하지 말라 신윤식 2012.06.03 4311
» 예레미야 (33강) 선지자의 질문 신윤식 2012.06.10 4297
255 예레미야 (34강) 내 집을 버리며 신윤식 2012.06.24 4229
254 예레미야 (35강) 썩은 허리띠 신윤식 2012.07.01 4134
253 예레미야 (36강) 포도주로 찬 가죽부대 신윤식 2012.07.08 4187
252 예레미야 (37강) 부끄러움 신윤식 2012.07.15 4241
251 예레미야 (38강) 그들이 사랑한 길 신윤식 2012.07.22 4194
250 예레미야 (39강) 거짓 예언 신윤식 2012.07.29 4032
249 예레미야 (40강) 주의 이름을 위하여 신윤식 2012.08.05 4226
Board Pagination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