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7.08 13:12

(36강) 포도주로 찬 가죽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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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3:12-27http://onlycross.net/videos/jer/jer-1312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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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6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

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설교>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곧 자기 부정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기 긍정의 길에 선 채 십자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형식이며 위선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십자가 믿음이 왜 자기 부정의 길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곧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곧 자기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썩은 허리띠일 뿐이다’는 것이 자기 부정이며 이처럼 자기 부정의 길로 가는 신자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믿으십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십니까? 만약 이것이 여러분의 진실된 믿음이라면 여러분은 자기 부정의 길로만 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부정의 길로 가는지를 확인하려면 자신을 절대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셔야 합니다.

 

 

자신을 절대화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의 삶에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나,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나, 내가 대접 받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바로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말하는 교회도 자기 절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에게는 천국에서 남보다 더 큰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 하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신앙도 경쟁이 돼 버립니다. 우리가 이처럼 자기절대화의 길로만 간다면 우리가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유다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그릇으로 부름 받은 민족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서 전달할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이 사용하고자 하신 용도에 맞게 존재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과 함께 자신을 내려놓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을 절대화 하는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처럼 부강한 국가가 되고 싶어서 우상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유다는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썩은 허리띠 이야기입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유다도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여전히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또 하나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을 들은 그들이 선지자에게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신자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십자가는 무엇이고 믿음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보다 ‘다 아는 이야기 왜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채워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가죽부대는 포도주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하고 다 아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고 ‘다 안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는 말씀은 유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상태인가 하면 13절과 14절에서 말한 것처럼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주민들이 잔뜩 취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충돌하고 상하게 하며 부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상하게 하며 경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의미였는데 유다는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말하면서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유다가 오늘 우리들의 형편이라는 것으로 본문의 말씀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십자가를 말하면 다 아는 것처럼 반응을 할 것입니다. 식상해하고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안다면 철저한 자기 부정의 길을 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부정의 길이 아니라 계속 걸어왔던 자신을 긍정하고 절대화하는 길에서 떠나지를 못했으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 다 안다고 반응하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유다가 서로 충돌하고 상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각기 자기중심으로 살아감으로써 충돌하고 서로를 상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맺어지는 섬김과 봉사와는 이미 무관한 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안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만입니다.

 

 

십자가를 말할 때 ‘다 안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죄에 대한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죄인 된 자로 나아온다면 십자가에 대한 증거가 자신을 자유케 하고 기쁨으로 인도할 것임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말을 듣기 거북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말보다는 인정하고 높이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여전히 자신을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만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 9:4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소경된 자기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본다고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맹인이 되었다면 자기 눈을 뜨게 할 분에게 마음이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게 되면 보게 하신 그 분을 증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맹인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보게 하는 분을 향해 마음이 향하지 않게 됩니다. 보이기 때문에 보게 할 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술에 취한 듯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맹인의 상태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선지자를 보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죽부대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속이 죄로 가득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다 아는 얘기다’리고 반응하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자기 부정의 길인지 자기 긍정의 길인지를 살피십시오.

 

 

 23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임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 귀한 복음이 되어 우리 마음을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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