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7.22 13:55

(38강) 그들이 사랑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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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4:7-12http://onlycross.net/videos/jer/jer-1407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설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12절을 보면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금식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고, 정성껏 예물을 바치고 예배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을 단호하게 잘라버리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이처럼 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10절에서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유다가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길로 가기를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어그러진 길이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난 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유다가 사랑했다는 것은 그 길이 유다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돌이킬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어그러진 그 길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복을 받고자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은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고, 제사도 제물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유다가 어그러진 길을 사랑한 것은 그 길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저주와 심판의 선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다가 원하는 희망과 위로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기독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복음이 자신이 원하는 희망과 위로로 다가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희망과 위로의 말을 복음에서 듣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희망과 위로가 되지 않으면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다에도 평안을 외치는 거짓선지자가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하고 원하는 말을 듣게 해주는 거짓 복음을 복음으로 위장하여 전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를 향한 선지자의 말은 분명 희망과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가 외쳤던 말은 죄와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만 불편해졌을 뿐입니다. 유다는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보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구원될 수 없는 악한 자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사랑한 어그러진 길로만 간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죄의 길에 있는 죄인으로 여기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들을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릴 혜택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주시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혈통적 의미가 아니라 언약적 의미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으며 이들 백성의 특징은 자신들의 모든 죄를 덮으신 긍휼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죄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문제에 깊이 들어가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크다는 것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문제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원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원한 것을 챙겨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무엇이 어그러진 길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평안을 외치는 거짓선지자의 말이 달콤한 위로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통 인간이 듣기 원하는 말로 가득하다면 과연 그 말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가득한 교양을 위한 말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을 끌고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서 그 자리에서 무엇이 참된 생명이 되는가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끌고 내려가는 말씀이 달콤하고 즐거운 말로 들리겠습니까? 귀를 막아 버리고 싶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쫓아 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렘 5:21절에서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유다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를 못했고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유다가 사랑했던 어그러진 길을 생존과 연관된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당연히 생존과 연관된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도 자기 생존의 문제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생존의 문제를 앞세우기 때문이고, 제사와 제물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생존의 문제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를 앞세우게 되면 나는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기도 한다고 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며 제사와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복 주시는 분이 아님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나의 의가 되시고 생명이심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다만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역시 어그러진 길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문제가 우리가 여전히 그 길을 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것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서 신앙생활이 즐거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야 말로 초점을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두고 있는 생각입니다.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고, 모든 소망을 예수님께 두었을 때 예수님이 위로와 힘이 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하던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원치 않던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 조금씩 선명하게 마음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주께서 원하시는 주의 뜻만 있습니다. 그 뜻에 나의 소원을 두고 그 길로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관심은 생존보다는 생명에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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