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9.23 13:05

(46강) 주를 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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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7:12-18http://onlycross.net/videos/jer/jer-1712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설교>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실상과 함께 하나님이 이루실 나라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실상과 하나님이 이루실 나라에 대해 안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흘러가는 세상을 보면서 이 세상에야 말로 소망 둘 곳이 아님을 절감하고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종말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 종말, 즉 끝이 있다는 것은 현재의 것이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현재의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종말의 자리에서는 사라질 헛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아는 신자는 현재에 매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종말을 바라보면서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이 말씀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흘러간다는 이것이 신자에게는 소망이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허무맹랑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흘러간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도 세상의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모든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 아닌 사람은 애당초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말씀대로 흘러간다는 것도 무시하고 ‘내 하기 나름이다’는 사고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며 원하는 인생을 이루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세상을 말씀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위해 신을 찾는 길로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1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를 버리는 자가 수치를 당한다면 주를 버리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자는 주를 버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13절은 뻔 한 내용으로 다가오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 말을 하나님을 믿는 유다 백성을 향해 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주를 버리고 여호와를 떠나는 길로 가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외형적으로는 주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개종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겼지만 이방신으로 개종을 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주를 버린 것으로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종교를 버리는 의미에서 주를 버린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 안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종교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다 백성이 주를 버렸다고 하는 것은 15절의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네 말대로 이루어지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평온하다는 현실을 근거로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현실을 보면서 종말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평온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생각한다면 평온이 종말을 무시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결코 평온하지 않습니다. 평온하게 보이지만 죄로 가득합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만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평온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평온한 곳으로만 보게 되면 주가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를 떠나 사는 사람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평온과 함께 세상의 것을 누리는 현실만 보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와를 생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가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생명이시라면 우리가 여호와를 찾는 이유는 생존이 아닌 생명의 문제 때문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생명이 아닌 생존의 문제에 모든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생명이 근원되시는 주를 버린 것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문제는 멀리 보고 생존의 문제는 바로 지금의 현실로 바라봅니다. 생명은 종말과 연관이 있는데 종말은 멀리 있으니 생명에 대한 것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현실의 문제로 바라보는 생존에 마음을 뺏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명의 하나님을 떠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신자는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습니다. 따라서 현재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보이고 탄탄하다고 해도 말씀으로 되어질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세상이 아닌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은 선지자에게는 말씀이 곧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16절에서 ‘목자의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입장이 아닌 목자의 직분만을 생각했기에 ‘말씀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발하는 유다 백성을 향해서 심판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종말을 세상의 현실로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종말을 참된 현실로 바라본다면 자연히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께 온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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