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11.04 14:02

(51강) 예레미야와 바스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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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0:1-6http://onlycross.net/videos/jer/jer-20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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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본문을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와 함께 바스훌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바스훌은 제사장이며 여호와의 성전을 총 감독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당시 성전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다고 합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에게 이 같은 일을 한 것은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 때문입니다.

 

 

19장에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재앙이 떨어져서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이런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다 때리고 목에 나무 고랑을 채우고 잡아 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인해서 심히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에 대한 바스훌의 반응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세상은 반드시 분노하게 되어 있고 말씀을 밀쳐 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무기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특별하고 신기한 현상이 예레미야에게 함께 했으면 유대 사람들이나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예레미야에게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말씀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레미야 한 개인의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자신들을 책망하고 멸망을 예고하는 기분 나쁜 말로 들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스훌은 제사장이며 성전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바스훌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한 것입니다. 마치 신학박사에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의 귀에 시골의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천군 천사들이 예레미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유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면 예레미야의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붙들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평범한 말로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항상 초점을 사람에게 두게 되는 것입니다. 저 말이 복음이냐 복음이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고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보면서 복음으로 받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사람의 말로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순순히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을 보지 않고 말씀만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붙들어 끌어들이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말씀을 전하는 자를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도 무시 받고 천대 받을 수밖에 없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던져 놓으시고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 가로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를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마치 아무 힘도 없는 무기력한 것처럼 세상에 나타내시고 말씀 전하는 자 또한 무기력한 자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특이한 기적적인 현상과 함께 전해진다면 사람들은 말씀의 내용보다는 기적을 보고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말씀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지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말씀이 전해지는 현장에서는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귀에 들리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이 은총의 사건임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3절에 보면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목에 씌운 나무 고랑을 풀어 줍니다. 아마 혼이 난 예레미야가 다시는 그와 같은 예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무 고랑에서 풀려난 예레미야가 바스훌에게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고 예언합니다. 바스훌은 평화라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지만 마골밋사빕은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 보면 장차 바스훌이 겪게 될 일에 대해 예언을 하는데, 그 일은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으로써 유다가 겪는 처참한 일을 목격함으로서 공포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고 바스훌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죽어 거기에 묻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에게는 타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안위를 위해서 현실과 타협하며 말씀을 포기하거나 변개하는 것이 없이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말씀은 사람의 반응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것이 말씀의 목적인 것도 아닙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봤다면 다른 거짓선지자들처럼 사람들이 선호하는 평안을 외쳤을 것입니다. 바스훌을 향해서도 그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당할 재앙에 대해 변함없이 선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 일을 위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바로 이 일에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생각과 상식에 어긋나는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말씀의 역사와 능력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붙들려 있는 신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말씀을 참된 세계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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