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11.11 13:23

(52강) 하나님의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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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0:7-18http://onlycross.net/videos/jer/jer-2007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설교>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외쳤던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이 듣고자 하지 않고 반발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반발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는 배척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종일토록 치욕거리와 모욕거리가 되었다는 말을 8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가야 하는 인생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길을 스스로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치욕거리와 모욕거리가 되는 길로 가고자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치욕과 모욕이 아닌 영광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치욕과 모욕의 길을 간 것입니다.

 

 

왜 그 길을 버리지 않을까요? 얼마든지 그 길을 버리고 자신에게 득이 되고 영광이 되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말만 바꾸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유다백성들이 반발하는 파멸과 멸망의 선포를 버리고 거짓선지자들처럼 평안을 외치면 됩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말을 바꾸지 않았고 고집스럽게 하나님이 외치라고 하신 말씀만을 그대로 외쳤던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를 우리는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는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놀라운 큰일을 해서라기보다는 백성들이 요구에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간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뜻을 버린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스스로 간 길이 아니기 때문에 예레미야라는 한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부각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주께서 자신을 권유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길이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주께서 권유하심으로 가게 된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조롱 받는 길을 가게 된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권유하신 것이고, 때문에 선지자가 조롱을 받으면서도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을 주께서 이기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선지자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선지자의 길은 분명 인간의 본래 마음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길입니다. 그 길에는 인간이 원하는 부나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롱과 모욕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피하려고 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권유하시고, 그 권유에 순종하도록 강하게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강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권유한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권유이기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유다는 처음부터 선지자의 외침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우상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멸망의 길로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권유하시고 그 권유를 받아들이도록 강하게 역사하셨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이기셨다고 합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누가 여호와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은 그 마음이 온통 여호와로 인해 장악되지 않고는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취지의 생각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먼저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롱과 모욕의 길,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다면 가던 길을 바꿀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렇게 되면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전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간섭하신 증거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유를 받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자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장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해도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그 마음이 불붙는 것처럼 간섭을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께 붙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사방에서 비방을 받았고 서로 예레미야를 고소하려고 작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친한 벗도 예레미야가 넘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분명히 확신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운 용사 같으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신을 배척하는 그들이야 말로 지혜롭게 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치욕을 당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자신이 이긴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고 조롱한 무리들이 자신에게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힘의 승리를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배척한 자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수치를 받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무엇이 어리석음이고 참된 지혜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된 승리는 그때 증거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전까지 참된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 힘과 영광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 받는 나약한 것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간섭받고 있는 사람은 말씀을 떠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영광과 참된 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레미야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14,15절).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은 예레미야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하심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우리 힘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권유하시고 하나님의 권유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설령 조롱이 있다고 해도 믿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강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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