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12.09 10:45

(55강)여호야김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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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2:13-19http://onlycross.net/videos/jer/jer-22131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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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세워서 유다왕 여호야김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하시는데, 그 잘못은 자신을 위해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짓기 위해 이웃을 고용했지만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신의 배만 불리는 악덕 고용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야김에 대해 17절에 서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호야김의 잘못은 세상 기준에서 보면 단지 도덕적인 문제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에는 여호야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김의 잘못은 단순히 고용한 사람에게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에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17절에서 언급한 대로 탐욕, 무죄한 피 흘림, 압박, 포악이 품삯을 주지 않는 행동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호야김의 아버지인 요시야왕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시야왕의 그 같은 행동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것은 가난한 자를 어떤 생각으로 대하는 가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여호야김만이 가난한 자에게 포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의 왕인 여호야김에게만 시비를 거십니다. 유다를 침략하는 바벨론의 왕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를 학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왕에게는 선지자를 보내시지도 않고 그의 최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유독 유다를 이렇게 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세상에 나타내어야 할 역할자로 세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인가를 유다 왕들을 다루시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영원한 멸망이기에 이방 나라에게는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을 알았기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변호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변호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요시야 또한 그 같은 실행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행동은 가난한 자에 대한 인간의 동정심과는 무관합니다. 인간의 동정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안 앎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이나 양심이 아니라 앎에 의한 실행인 것입니다.

 

 

레 19:9-10절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추수할 때 곡식을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합니다. 이왕이면 더 많은 것을 남겨 두어서 가난한 사람이 배부르게 먹도록 하면 좋을 것인데 겨우 밭모퉁이와 떨어진 이삭을 남겨 놓으라고 말씀할까요?

 

 

하나님의 규례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곡식을 수확함으로 풍족해진 형편에서도 자신들의 본래 위치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가난하고 궁핍했으며 나그네였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으로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가난한 자를 변호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가나안 땅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본래적 모습은 재물이 많아지든 작든, 권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아져서 부하게 된다고 해도 그 본래적인 모습은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나 권력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인식할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가난한 자를 변호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의 출처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인식하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앎으로 인해서 현실화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여호야김은 자신의 왕적 권위를 근사한 궁궐을 지음으로써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유다에서 왕적 권위는 그처럼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 앎이 현실화되는 삶의 길로 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되심을 자신의 삶에서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며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가난을 구제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봉사와 구제에 힘써야 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복지 차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복지단체, 구제 기관으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 61:1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소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나는 과연 가난한 자인가’입니다.

 

 

여호야김의 잘못은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비록 왕의 자리에 앉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가 왕의 자질이 있다거나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따라서는 그는 자신의 왕 됨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왕의 자리에서 나타내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위해 집을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든, 어떤 위치에 있든 본질적인 모습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바꾸지를 못합니다. 결국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부요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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