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예레미야는 자신과 같은 선지자들을 비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 예언으로 유다 백성을 부패의 길로 끌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지만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전함으로써 자기 안위를 꾀하는 일에 힘썼고 이것이 참된 선지자와 갈등과 대립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예언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말은 예언이 될 수 없으며, 참된 예언의 말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선지자는 칼 같은 비판을 통해서 그들의 예언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비판을 보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을 하면서 자신의 예언을 하나님께 받은 참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꿈을 꾸었다고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꿈을 하나님의 계시의 방식으로 믿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신 일이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꾼 것이나, 요셉이 꿈을 꾼 것이 그러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 받은 일이 있습니다. 환상을 보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꿈이나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자신의 앞날을 보여 주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꾼 꿈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비주의에 물든 것이고 거짓 선지자들처럼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기위해 꿈을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꿈이나 환상은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도 아니며 말씀도 아닙니다. 모두가 거짓이며 개인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꿈에 집착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꿈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을 하면서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현상을 신앙의 근거로 삼으면서 결국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는 잘못된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꿈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은 항상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은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 달성을 위해 신자를 미혹하는 말일 뿐입니다.
신자는 강단에서 외쳐지는 말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다고 할 수 없고,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모두가 진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와 동일하게 지금도 말씀이 아닌 거짓 예언으로 신자를 미혹하는 일이 가득하기에 설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거짓 예언은 마음의 간교함에서 나옵니다. 즉 간교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간교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것일까요?
창 3장에 보면 뱀을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합니다. 간교한 뱀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하지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말함으로써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 버립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말씀에 순종치 않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이 없게 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마귀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순종치 않은 유다를 향해 철저한 심판을 외쳤지만 거짓 선지자는 평안을 외치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유다의 현실을 가려버립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심판보다는 평안을 원합니다. 하와 역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보다는 먹음으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보다는 복을 받는 것을 더 열망합니다. 복을 받는다면 세상에서 힘을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와 심판에 대한 말보다는 복에 대한 말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간교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신자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믿음을 자신을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로 여기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결국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30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을 치리라고 하심으로써 말씀 아래 있지 않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설교가 아무리 마음에 들고 감동이 된다고 해도 거짓이면 그것은 말씀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신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설교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고, 내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바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은 그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진리냐 아니냐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들고 재미가 있으면 은혜가 된다고 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이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갓바위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차이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거짓 예언이 진리로 가장하여 신자를 미혹합니다. 수많은 강단에서 말씀이 도둑질 당합니다. 거짓된 말에 ‘아멘’하면서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자에게 진심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고 말씀을 분별하면서 생명의 길을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에 속지 않고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참된 말씀을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