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1.20 10:02

(61강) 엄중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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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3:33-40http://onlycross.net/videos/jer/jer-23334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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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3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

34 또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선지자에게나 제사장에게나 백성에게는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안을 벌하리라 하셨다 하고

35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하고

36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하고

37 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38 너희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말씀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니 너희는 말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였은즉

39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40 너희는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말씀만 주셨다면 말씀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었을 것입니다. 말씀이 제아무리 우리를 빛의 세계로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해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림 속의 떡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닌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을까요? 우린 말씀에 대한 유다의 그 같은 반응을 보면서 민족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늘 말씀에 대해 반발하고 싶은 본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본능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하기보다는 여전히 본인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에 충실하게 합니다. 이러한 본능까지 다스리시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것을 믿게 하기 위해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그것을 힘으로 자기 인생을 버티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죄인가를 알게 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죄를 알지 못한 채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추구하는 세상의 것을 손에 쥐지 못한다면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미래, 즉 인생의 전부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펼쳐지고 있음을 압니다.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고, 말씀에서 배우고 알게 된 하나님께 마음을 두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평안입니다.

 

 

33절을 보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묻거든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라고 답하라고 하십니다.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의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할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부담되는 말만 하고 있는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네 멋대로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엄중하다고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형식적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엄중하다고 함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엄중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엄중한 말씀이니까 내가 하는 말에 반발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에 보면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하게 여기고 배척하면서도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고자 하는 것이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은 엄중합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그 의도가 말씀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이고,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말씀이 엄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대로 모든 일을 이루심으로 말씀의 엄중함을 보이실 것을 믿게 됩니다.

 

 

말씀의 엄중함은 신자의 구원과 함께 세상의 심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함께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는 철저한 보응이 있을 것을 보이십니다. 이것이 장차 세상에 임한 말씀의 엄중함입니다.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피조물 된 자로서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살았던 것이 심판이 마땅한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고 피조물의 본분임을 알게 하셔서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로 인도 해달라고 기도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한 말씀의 역사입니다. 말씀은 신자에게 이렇게 엄중하게 역사합니다.

 

 

현대 교인들은 말씀을 엄중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엄중한 말씀이니 말씀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믿는 것은 믿음으로 살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엄중하니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결국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엄중함은 우리를 죄의 자리로 끌어내어 심판이 마땅한 악한 내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로 인해 죽으셨는가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크신 은혜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우리를 이 같은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 엄중한 말씀과 함께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나의 불의와 함께 연약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영광을 추구했던 악함을 내려놓으며 주의 영광이 증거되는 길로 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과 함께 믿음이 주어진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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